"국뽕"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있다.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로, 무언가에 기분 좋게 취해 즐기는 상태를 나타낼 때 뽕 맞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국뽕은 자국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어 자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뜻한다.
근데 뽕에는 국뽕만 있는 게 아니다. 국뽕 외에도 여러 가지에 대한 도취가 존재한다.
남성성에 대한 도취
넷플릭스에 <피지컬: 100>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가장 완벽한 피지컬(뛰어난 체격이나 몸의 비율 따위)을 가진 최고의 '몸'을 찾기 위해, 최강 피지컬이라 자부하는 100인이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그린 작품이다.
대개 남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운동욕이 불타오른다. 내일부터 운동을 시작할 것을 다짐한다. 괜히 티브이를 보다가 가서 팔 굽혀 펴기 따위를 하는 남자도 있다. 물론 거울에 비친 몸은 볼품없다.
남자의 군뽕
<강철부대>라는 밀리터리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최정예 군 특수부대 출신 예비역들이 각 부대의 명예를 걸고 대결을 펼쳐서 최종 우승 부대를 가린다.
대개 군필 남자들은 이 프로그램을 보면 군뽕이 차오른다. (비록 특수부대는 영화로만 봤을지라도) 자신의 군대경험을 떠올리며 과몰입한다. 그래, 그때 훈련이 저렇게 힘들었지. 나 한창 때는 군장 메고 날아다녔는데...
이런 군뽕은 미국에도 있다. 특히 전쟁영화를 볼 때 군뽕이 극한에 달한다.
<위 워 솔저스 We Were Soldiers>라는 영화가 있다. 베트남 전쟁 초기 격전 중 하나인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를 다룬 2002년 할리우드 전쟁 영화다.
영화 초반, 주인공 할 무어 중령은 베트남으로 파병을 떠난다. 어두운 새벽, 그는 잠자는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춘 뒤 조용히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가족과 나라를 위해 파병 떠나는 그의 표정이 비장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숨죽여 자는 척하고 있던 그의 아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잠옷바람으로 남편을 보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간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한다.
나도 영화 속 할 무어처럼 미군이라, 가끔 이 영화를 보고 군대로 출근하는 아침엔 군뽕이 충만하다.
새벽에 조용히 일어나 비장한 표정과 마음으로 샤워를 한다. 우리 가족이 살아갈 세계 평화를 위해 장렬히 이 한 몸 바쳐야지. (난 파병을 떠나는 게 아니라 안전한 부대 사무실로 출근하는 거긴 하지만) 집을 나서기 전 할 무어처럼 잠든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갈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멋진 거 같다.
아내 때문에 내가 멋있으래야 멋있을 수가 없다
샤워를 하고 조용히 안방에 들어갔는데 침대에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불은 정리되어 있고, 침대 위에는 양말부터 모자까지 내가 입고 출근할 옷이 가지런히 꺼내져 있다.
옷을 입고 부엌으로 나가보니 커피 향이 가득하다. 아내는 따뜻한 커피가 담긴 텀블러와 출근길에 운전하면서 한 손으로 편하게 먹을 수 있게 준비된 아침이 담긴 가방을 내민다. 아침에는 탄수화물을 잘 안 먹는 날 위해 껍질 깐 삶은 계란, 적당한 크기로 썰린 소시지, 먹기 편하게 썰린 파프리카, 그리고 후식으로 먹을 사과까지. 세심하고 사려 깊고 센스 있다.
감동에 취하는 날 보며 아내는 도시락과 텀블러를 내밀며 쿨하게 말한다. 늦겠다. 얼른 조심히 다녀와.
새벽부터 나보다 분주히 움직인 아내의 볼에 입을 맞추고 차에 올라 출근길에 오른다. 운전을 하며 한 손으로 아내가 챙겨준 가방 속 삶은 계란을 집어든다. 계란은 아직 따뜻하고, 한 입 베어무니 내가 좋아하는 완벽한 반숙의 삶은 계란이다. 이번엔 소시지를 먹어본다. 짭짤한 소시지가 삶은 계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내가 결혼 하나는 진짜 잘했다. 오늘도 이 여자 위해 이 한 몸 바치리라 다짐한다.
잠든 아내를 뒤로하고 멋지게 나서려고 했는데, 출근길에 삶은 계란 먹으며 주책맞게 눈물이 글썽여진다. 원래 내가 아니라 아내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