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했다고 느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그야말로 내게 ‘이방인’처럼 낯설게만 느껴졌던 책이었다. 그래서 같은 책을 반복해서 깊이 읽는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읽게 했던 책이다. 같은 책을 여러 연령대를 거쳐 읽은 느낌은 역시 달랐다. 삶의 연륜이라는 것은 이럴 때 묻어나는 것인지.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아마도 꼭 읽어야 하는 명작 리스트에 올려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멍했다. 한 마디로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20대 초반이었다. 심심하고 무료했던 어느 날 무심결에 집어든 책이었다. 지난 날 ‘그래서 어쩌라고’에 대한 기억이 또렷했기에 대체 이 책이 왜 그렇게 유명한 건지, 중학생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음이다. 두 번째 느낌은 ‘뜨거운 태양’의 의미가 조금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딱 거기까지였다.
세 번째 읽은 지금은, 이미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긴장, 그리고 두려움 속에 읽었다. 제발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래서 어쩌라고’의 설익고 텁텁했던 첫 느낌은 강산이 몇 번 변한 후에는 ‘제발’이라는 간절함으로 바뀌어 나타났다.
사람을 죽인 이유가 ‘뜨거운 태양’ 때문이었다는 밑도 끝도 없는 표현은 그대로 가슴에 꽂혀 들어왔다.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무엇에도 한 생명을 앗은 것이 합당화 될 수는 없으나, 그가 느꼈을 느낌은 알 것 같았다.
<이방인>은 안 읽은 사람은 있을지라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알베르 까뮈의 작품이다. 롤랑바르트가 부러워한 작가, 까뮈. 그 어떤 색채도 묻어나지 않는 덤덤한 중성적인 문체로 써 내려간 거작. 어떻게 그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객관화해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나도 모르겠다”로 시작하는 <이방인>의 첫 문장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떠올리게 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는 그 방대한 책의 내용울 이 한 문장에 모두 담아 놓았던 것처럼, 이방인 역시, 이 짤막한 한 문장에 모든 암시가 담겨있었다.
내향적인 성향의 별로 사회적 야망도 갖지 않은, 그저 지금의 생활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는 뫼르소라는 한 평범한 인간이 별 의미 없이 이어진 우연의 반복으로 급기야 사람을 죽이기까지의 스토리 전개는 너무나 담담해서 무섭기까지 하다. 삶이 한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 걸까. 괴물같은 사회의 부조리가 한 인간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것'이라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드는 우연적인 사건들. 엄마가 죽었고,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래서 울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피곤했기에 밤을 새지 못하고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담배를 피웠을 뿐이고, 관리인이 권한 카페오레를 마셨을 뿐이다. 그 평범한 사건의 연속이 그를 소시오패스로 둔갑시키고 죽음으로 내몰게 되는 바로 그 이유가 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피고인이 기소된 것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서라는 겁니까,
사람을 죽여서라는 겁니까?
변호인의 변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살인을 했기 때문이 아닌, 엄마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 엄마의 나이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 담배를 피운 것, 카페오레를 마신 것,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한 것, 영화를 보았다는 것, 바다에서 수영을 한 것이 절대로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되었고, 그는 죽어 마땅한 인간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다고,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들이 큰 도움이 될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귀찮아져서 그러기를 포기해 버렸다.” (P95)
“혹시 내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사실 후회라기보다는 성가심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P100)
뫼르소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그가 엄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인륜을 거스르는 불효자의 모습 때문도, 살인을 저질렀다는 직접적인 이유도 아닌,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하지 않은 ‘귀찮음’이 러 일으킨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재판장이, 변호사가 또는 지인들이 이해를 필요로 할 때, 그는 침묵했다. 귀찮음을 이유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는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타인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고 체감화가 되지 않았던, 그래서 그토록 차분할 수 있었고, 모든 것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보편적인 사회적 시선에서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책 속의 뫼르소에게만 가해진 형벌일까. 우리 주위에서도 많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가 배우고 자란 환경에서 습득한 가치나 편협적인 사고로 마치 그것이 진리인양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가.
엄마 장례식 때 요양원에서 만난 이들의 증언과 기자들과 검사들의 행동은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자신들이 그리고자 하는, 보여주고자 하는 그림만 보여주며 선동하는 무리들. 뫼르소는 그 모든 것을 철저한 타인의 시선으로 응시하며 부조리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진실을 지켜낸다.
<이방인>을 읽는 내내 까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방인으로 살아온 까뮈가 뫼르소 위에 그려졌음은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글도 모르고 책도 읽지 않는 집에서 어린 까뮈는 이방인이었고, 축구를 그렇게 좋아했지만 축구화가 닳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택한 포지션이 골키퍼였을 만큼 빈곤했던 까뮈는 부유한 친구들 가운데 초라하고 가난한 이방인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까뮈는 알제리 촌놈 이방인이었고, 젊은 나이에 노벨 문학상을 타지만 그랑제콜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당시 샤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 사이에서도 이방인이었다고 정승민 교수는 말한다.
꽃미남으로 수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노벨상까지 받은 뛰어난 문인이지만, 까뮈는 자신이 속했던 그 어느 사회적 영역 속에서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켠에 시린 바람이 불었다. 자꾸 먹먹해져 책을 덮지도 못하면서 숨을 고르기 위해 자꾸만 멈춰야만 했다. 그가 느꼈을 고독과 외로움이 어둠처럼 엄습해 왔다.
뫼르소는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슬픔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했다'며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무관심한 듯 맞이한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했다고 느꼈다.” (P166~P167)
나는 내 삶을 앗아가버린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 무관심의 시선으로 자신의 진실을 지켜내며 죽음 앞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까뮈의 책을 읽으면 어김없이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가 떠오른다. 그가 스승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섬>에 쓴 서문을 읽으며 차오르는 뜨거움을 어쩌질 못해 그를 쫓아 뛰어갔던 나의 어설펐던 청춘.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까뮈가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 그 젊은이가, <섬>을 읽는 그 순간, 나일 수 있었음에 가슴 벅차했던 그 때를 나 역시 뜨거운 마음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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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Else Matters by William Joseph
록 그룹 Santa Esmeralda의 절절한 록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표현될 수 있다니..
제목이 뫼르소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