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난한 게 싫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난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원래 가난하게 태어났고 원래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셨고 원래 이렇게 살아왔다.
굳이 위로 가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굳이 남들과 비교하며 살지도 않았다.
중앙시장에서 용달 일을 하시는 아빠의 직업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흙수저였지만 누구보다 가족들 먹여 살리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몸을 다해 일하셨던 분이시기에 땀에 젖은 옷도 부끄럽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분이셔서 가족들에게 다정다감하지 않으심에 불만이 있었지 아빠의 경제력에 불만은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남들 다 받는 과외 한번 못 받았어도 괜찮았다.
나만 열심히 하면 성적도 잘 나왔고 나만 열심히 하면 수능점수도 잘 나와 그래도 서울 2호선 라인에 있는 대학에 수시 합격했으니까 말이다.
명품 옷 하나 없이도 대학생활도 잘했다.
일요일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학생회 활동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해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결혼하기 전까지의 '나'는 그랬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나'라고 할 수 있겠다.
결혼상대도 그저 본인 일 열심히 하고 나 하나만 사랑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22살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보다 11살 많은 지금의 남편과 만나 23살에 결혼했다.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라 처자식을 굶겨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엄마의 결혼관을 빼다 박았나 보다. 나 역시 그 가치관 하에 지금의 남편과 23살에 결혼해 24살에 큰 아이를 낳았다.
성동구 어느 곳,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이지만 남부럽지 않았다.
나만의 보금자리가 생겼고 나만 사랑해주는 이가 옆에 있었고 나만 애타게 찾는 아이가 있었으니까.
가난에 무지했던 나를 각성시킨 것은 다름 아닌 아이였다.
첫째 아이를 낳고 백일만에 일을 하러 나갔어야 했다.
남편이 하던 가게는 일손이 하나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고 남편 혼자 운영하기에는 벅찼다. 3개월씩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남편은 지칠 대로 지쳤다. 갓 백일 된 첫째는 바로 위층에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틈틈이 봐주셨으나 그조차도 사치였다.
"나는 애는 못 본다"시던 친정엄마의 완강함에 결국 아이를 들처업고 가게에 나가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내 남편이 가게일을 안 했으면 좋겠다.
우리 집이 좀 부자였으면 좋겠다.
내 새끼가 집에서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를 업고 일하는 게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좁은 가게 한 구석에서 엄마, 아빠가 정신없이 바쁠 대로 바쁜데도 유모차에 쥐 죽은 듯이 앉아만 있어야 하는 5개월짜리 아이가 늘 안쓰러웠다. 어린 아기가 기가 막히게도 바쁜 시간이 지나면 안아달라 칭얼대기 시작하더라. 가게 오는 손님들 이 사람 저 사람이 아기의 손이며 얼굴을 만지는 통에 늘 잔병치레를 달고 살았던 것이 못내 속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달 한 달 최소한 굶지는 않으니까, 아이 장난감은 돈걱정 없이 사줄 수 있으니까, 등의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 자신의 피폐하고 허한 마음을 돈으로 풀었다.
감히 내 주제에 부자가 되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했다.
뒤늦게 가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때만 해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어떻게 해야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찾아다녔다. 더 열심히 일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가졌다. 우리 아버지도 평생을 늘 열심히 일만 하며 사신 것을 보고도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최소한 가난에 대해 각성은 했으니 한발 나아간 셈이긴 하다.
좀 일찍 깨달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