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그라미 Dec 08. 2020

그날의 게임

게임을 대하는 자세

닭강정이 차를 타고 오고 있다. 요즘 어플은 내 닭강정이 차로 오는지, 오토바이로 오는지, 어디쯤에서 신호에 걸려 멈춰있는지까지 나온다. 배달 오는 차량의 기름 값이 걱정되었다. 집 주변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나가보니 아주 고급까진 아닌데 꽤 괜찮은 차량 조수석에서 닭강정이 내렸다. 역시 걱정은 괜한 걱정. 전화 버튼을 눌러 언니에게 술 한 잔을 하자고 했다. 9시. 아직은 아이들이 잠들지 않은 시각, 닭강정을 들고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둘째가 문을 열어주면서 꽤나 나를 반긴다. 날 보자마자 오목을 하자고 졸라댔다. ‘제발’이란다. 대체 오목이 뭐라고. 지난번에 나와 겨룬 승부가 꽤 재밌었던 모양이다. 하긴, 난 오목 고수니까. 조카라고 어설프게 봐주지 않는다. 연패의 굴욕이 승부욕 강한 둘째를 끓어오르게 한 것이다. 맥주가 급한데, 오목 자리가 먼저 펴졌다. 며칠 사이 두는 수들이 강력해졌다. 그래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기고 이기고를 계속하며, 이건 바둑이 아니니 나의 3수 앞까지 계산할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슬쩍 빈틈을 보여주니 얼른 눈치채고 드디어 승. 이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돌을 정리한 녀석은 바로 다시, 첫 돌을 올려놓았다. 한번 이기게 두면 끝날 줄 알았는데, 조카의 승부욕을 너무 쉽게 본 걸지도.       




고등학교 시절, 모눈종이 하나면 쉬는 시간이 얼마든지 채워지곤 했다. 난 앞뒤 아이들을 상대로 오목을 두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다섯 개의 돌을 만드는 것에 혈안이 되었던 그 시절은 돌아보면 참 즐거웠다. 게임을 좋아하냐고? 아이러니하게도 난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 이기는' 룰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내가 이기는 것은 좀... 불편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이기는 횟수를 조금씩 조율하기 시작했다. 승부조작이라고? 어쩔 수 없었다. 나에겐 상대와 나 모두 즐겁게 게임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난 몇 번을 이기고, 몇 번을 져주는 것을 반복했고, 한 번도 들키지 않았었다.


그날 전까진.      


우리 반, 전교 1등을 하던 그 애는 나를 흥미로워했다. ‘너 좀 특이한 거 같아.’라는 말로 나를 자극했다. 그 당시 나는 특이한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추구했다. 나를 드러내며 괜한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으리라. 그랬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나를 들킨 것 같아서 그 아이의 접근이 사실 그렇게까지 유쾌하진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던 나에게 그 애는 더욱 다가왔고, 내가 오목을 두는 것을 옆에서 며칠 구경했다.


그날은 꽤나 승부가 치열했다. 동그라미를 어디에 그릴지 고심하던 그때, 이미 눈치챈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난 그 아이의 눈빛을 읽었다.


아, 제길.  


그리고 며칠 뒤, 그 애가 자석 바둑판을 가지고 학교에 왔다. 판을 꺼내 들고 나에게 대국을 하자고 말했다. 그 옛날 바둑을 배운 적 있다고 했던 말을 흘려듣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 아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순간 바둑판 앞에서 난 고민했다. 이겨야 하는가, 적당히 해야 하는가. 그날의 대국은 나에게 너무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대국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말했다.     


그만하자


내 의도를 명확하게 알았을 것이다. 너와 대국하기 싫다는 말을 돌로 하고 있었으니. 바둑의 큰 판을 무시하고 작은 돌만 쏙쏙 잡아내는 날 보고, 내 뜻을 읽었겠지. 누군가에게 미움받았던 기억이 있던 난, 굳이 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안전하게 아이들과 오목을 두는 즐거움을 그 애와의 대국으로 깨고 싶지 않았다. 고수가 되는 것보다 내가 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저, 꽤 재밌게 오목을 같이 둘 수 있는 애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지금과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때부터 서서히 이기는 법을 잊었는지도 모른다고.




아!! 이모 일부로 진 거지!!!


똑똑하긴. 요 녀석 벌써 눈치를 챈다. 술 마시고 싶어서 일부로 그런 거지!!! 하면서 포효하는 둘째를 보면서 언니가 빵 터졌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 후로 몇 번을 이기고 한 두어 번 진 후, 다음에 또 같이 하겠다는 약속을 백번 하고 나서야 둘째는 잠이 들었다. 언니는 말했다. 얘가 요 근래 이렇게 흥분한 건 처음이야. 너랑 노는 게 재밌나 봐. 그럼, 나랑 놀면 재밌지. 픽하니 웃어줬다.          


쭌, 오목은 바둑이랑 달라
조금 좁게 봐도 괜찮아


진지하게 고갤 끄덕이던 녀석은 바둑학원에 다닐 예정이라고 한다. 할아버지와 오래 바둑을 두며 실력이 꽤 좋아졌다. 지난 명절엔 사촌 형을 이겼다는 풍문이 들렸다. 어린 시절, 아빠는 내게 나중에 시집가서 시아버지와 대국 정도는 둘 줄 알아야 한다며 바둑을 가르쳐 주셨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빠는 손자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다. 아빠에게 배웠으니 녀석도 잘할 수밖에. 지금보다 더 잘하고 다며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단다. 언니 부부는 어디가 좋을지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코로나가 해결이 안 되었으니 우선, ‘고스트 바둑왕’을 읽어보길 권했다. 가뜩이나 재밌는 바둑이 더 재밌어질 테니.


앞으로 녀석은 자신만의 게임의 룰과 태도를 만들어 갈 것이다. 부디 나와는 다른 길을 걷길 바라본다.


당분간 언니 집은 좀 멀리할 예정이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바둑은 시간이 오래 걸려 피하려는 나다. 허나,  그 집에 가면 이런 내 의도와 상관없이 더 긴 시간 오목 타임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오목 지옥은 피하고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오타의 가벼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