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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May 22. 2021

그녀의 질문

당신에게, 당신의 딸에게 미안해요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의 목소리를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갈갈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예전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강하게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찾고 있었다. 엄마는 지금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말씀드렸더니 오늘 오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셨다. 맞다는 말에 혹시나 해서 물었다고 '허하' 소리를 내며 웃으셨다.


전화가 마무리될 무렵 그녀는 물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니?



그냥저냥 지내요.

반사적으로 답을 했지만 난 속으로 흠칫했다. 그냥저냥 지낸다라... 결국 그런 뜻이다. 별거 없죠 뭐. 여전히 당신의 딸을 힘들게 하고 있고요.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그 마음에 말투가 조금 더 살가워졌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소유한 집을 팔고 전셋집으로 들어가겠다는 그녀의 폭탄선언으로 집안이 적지 않게 시끄러웠다. 엄마는 단호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들어줘야 한다고. 공인중개사인 엄마는 빠르게 일처리를 했고, 계약이 마무리되던 날 엄마에게 전화한 그녀의 목소리엔 웃음이 묻어 있었다.


오늘은 등기를 처리하기로 한 날. 약속된 시간 4시에 맞춰 도착할 수 있도록 엄마와 난 집을 나섰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쯤이냐고. 그녀는 무려 30분이나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괜히 마음이 급해졌지만 달라지는 것 없이 우린 정시에 도착했다.


엄마


동사무소로 들어선 엄마의 목소리에 대기의자에 앉아있던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일 년 만인가? 아니다 더 되었을 것이다. 2년도 넘게 시간이 흐른 뒤 본 그녀는 내 예상과는 정말 달랐다. 내가 아는 그녀는 평생 농사를 지어 까맣게 얼굴이 탔고, 거친 손에 주름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비싼 화장품을 아낌없이 사용해 까만 피부엔 번들번들 광이 났고, 허름한 난닝구 차림에도 손가락 사이엔 색색의 가락지를 낀, 매번 그녀의 딸에게 너도 좀 꾸미고 돌아다니라고 채근하던 그런 여자였다.  


하지만 못 본 사이에 그녀의 시간은 내 생각보다 많이 흘러있었다. 구불구불 파마가 된 머리는 예전보다 숱이 너무도 확연히 줄었고, 연한 갈색 머리 아래론 흰머리들이 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수분기가 확 줄은 그녀의 얼굴엔 검버섯이 여럿 피어나 있었다. 반가워 웃는 그녀의 웃음은 언제나 힘이 있었는데, 오늘따라 희미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으로 여기고 싶었다. 동사무소 의자에 앉아 엄마가 말한 주민등록증과 도장을 꺼내는 그녀의 속도는 많이 달라있었다. 건네받은 주민증 속 사진은 유난히 빠릿빠릿했던 시절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당연한 일이다.

아흔을 넘긴 그녀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로도 감사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한켠이 꾹 하고 눌리는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몇가지 확인을 위해 그녀에게 그녀의 아버지 이름을 물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몇 초간 많은 생각이 오갔다. 언젠가 나도 내 아버지의 이름을 잠시 고민하는 날이 오겠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






서류처리가 끝나고 그녀의 택시를 기다리던 엄마는 말했다.

 

엄마
앞으로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영양주사도 많이 맞고
돈 쓰고 싶은 대로 펑펑 써.

응, 그럴게


몇 달 전, 계약이 마무리되던 날도 같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이제야 그녀의 대답이 가진 깊이를 깨닫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몇 달 전보다 훨씬 얼굴이 좋아진 거라고.

그날 저녁 엄마는 물었다. 혹시, 할머니와 함께 살 마음이 있냐고. 살면 사는 거지 뭐. 엄마는 지나듯 말했다. 네가 할머니한테 잘할 것 같아서 말이지. 나같이 못된 년이 뭐 얼마나 잘하겠냐고 반문하려다 말았다. 그 말의 깊이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그녀는 같이 밥을 못 먹고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밥 같이 먹어야 하는데...
놀러 와. 밥 먹으러 와.


그녀는 택시를 기다리며 몇번이고 아쉬워하셨다.


할머니 놀러 갈게요.

고기 사둘게.

고긴 우리가 사가야지.

 

뭐, 이런 말을 나누며 그녀는 택시에 올랐다.


그녀는 나에게 차를 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무슨 차야 할머니. 있는 차도 없앴는데라고 한 걸 이제야 후회한다.


할머니 연락 자주 드릴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세요.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중 직원이 내게 그녀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번호가 없던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가 잠시 맡겨둔 그녀의 폰이 내 왼손에 있음을 자각하고, 그녀의 폰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야 그녀의 번호를 안다. 못된 년, 속으로 중얼거리며 저장을 마쳤다.


가끔 그녀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할머니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앞으로 쌓아갈 전화들이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그게 그녀의 딸을 괴롭히는 내가 남아있는 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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