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조금 시들해진 것 같지만, 몇 년전까지 꽤 유명했던 소셜 미디어 문화 중 하나는 대나무숲이었다. 익명을 빌어 허심탄회하게 각자의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는 온라인 게시판이라 할 수 있는 대나무숲은 큰 인기를 끌었고, 곧 인터넷 상에 각 학교별, 지역별 대나무숲이 하나씩 심어졌다. 그 중에서도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은 탁월한 필력을 자랑하는 글들로 유명했는데, 그중 몇몇은 ‘레전드’ 글로 분류되어 아직도 회자된다. 이 레전드 글 모음은 편집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는 글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고장난 시계에 대한 것이다. 이 고장난 시계에 대한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해당 게시글을 쓴 필자의 집에 있던 시계 하나가 고장이 났는데, 몇 달째 고치지 않아 계속 2시16분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필자의 친구가 고장난 시계에 대해 말하길, 그 시계는 최소한 하루에 두 번은 필연적으로 정확한, 세상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게시글의 필자는 행복을 찾는 것은 시계를 맞추는 것과 유사한 일이기에 가장 정확한 시간을 찾아 맞추려고 할수록 그럴 수 없어 불행해진다고 한다. 따라서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시계 태엽을 계속 감으며 완벽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건전지를 빼고 시계를 맞추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행복할 수 있을 테니.
젊은 지성의 일상 속 통찰은 분명 일리가 있다. 끊임없이 시계 태엽을 감아 아무리 완벽한 상태를 추구해도 결국 그에 닿을 수 없기에 불행하다는 말은 김지연 작가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에 기고한 ‘시계 밖으로 탈출하는 삶을 위하여’를 읽어보면 보다 명징해지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사회의 편의에 맞춰 측정하고 구분한 시간적 개념에 자기 스스로를 맞춰가다 보면 (흔한 클리셰이지만)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비약동적 삶을 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말마따나 진짜 ‘시간’을 살아가려면 각자가 직접 경험하는 순간들을 모아 지속시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쯤에서 고장난 시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사유를 위한 관찰에 말꼬리를 붙잡아 물고 늘어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고장난 시계가 최소한 하루에 2번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는 ‘정확한 시계’일 수 있을까? 이런 논리라면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서 시간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답을 도출하는 단편적인 정확성이 아니라 근사치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해를 구해가는 과정에 있다. 조금 더 파고들어 보자. 고장난 시계는 적어도 하루에 두 번은 시각을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을지 모르나, 핵심은 그 시각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언제가 ‘2시 16분’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나무숲에 올라온 게시글은 결국 인지할 수 없는 진실 또한 진실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인지할 수 없는 진실의 효용성을 고려해 봐야 하는데,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인지할 수 없는 진실은 실생활에서 거의 무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예능으로 한 얘기를 다큐로 받는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일상 속에서 발견한 사소한 관찰에 진실의 인지 가능성을 들이대는 것은 다소 불합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시계의 건전지를 빼버리는 것은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계 태엽을 감아야만 한다. 이렇게 시계 태엽을 감는 행위는 적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근사치일지언정 완벽한 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노력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 시계 건전지를 빼버리는 것은 시계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세상이 구분한 시간적 흐름에 귀를 닫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시간이 너무 잘게 쪼개져 이용당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보편적 시간의 구분 또한 인지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이 바로 잡혀 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시계 밖으로 탈출해야 하기 위해서는 시계 태엽을 계속 감아야 한다. 때가 되면 시간을 알려주는 뻐꾸기 같은 삶이 싫어 시계 건전지를 빼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가치 있는 것은 능동적으로 시계 태엽을 감아 세상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 아닐까? 오늘도 약동하는 삶을 위해 의지적 태엽 감기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