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유독 좋아하는 단어가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우주’였다. 시골에서 자라서 밤이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 우주를 상상해 볼 수 있어서 그랬을 지 모르겠다. ‘우주’는 그렇게 듣기만 해도 가슴 뛰고 설레는 단어였다. 집 우(宇), 집 주(宙)가 결합된 한자어 ‘우주’는 말 그대로 만물이 살아가는 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아마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개념의 공간일 것이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이 우주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세분화한다. Space, Universe, Cosmos가 그것이다. 우선, Space는 지구 대기권 밖 우리가 장악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굳이 나눠보자면 태양계 안쪽 정도가 될 테데, 인류의 과학 기술이 발전해서 더 멀리까지 탐사가 가능하다면 Space의 범주는 더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인류가 탐사할 수 있는 정도의 우주를 의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Space의 또 다른 뜻이 ‘공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Universe는 태양계를 초월하여 별과 은하들로 이루어진 천문학적 관점의 우주를 의미한다. 그리고 Cosmos는 Universe에 철학적 질서가 더해진 질서정연한 세계로서의 우주를 말한다. 정리하자면, Space에서 Universe로, Universe에서 Cosmos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확장되어 간다.
이번 르몽드 디플로티크 8월호에 게재된 김지연 작가의 칼럼 ‘힙플레이스와 핫플레이스, 저항과 소비 사이’에서는 공간의 확장을 독창적인 관점에서 분류한 대목이 나온다. 김지연 작가는 단순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그 공간만의 고유한 문화가 형성되고 경험과 시간이 쌓이면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공간(Space)에 맥락(Context)가 더해지면 장소(Place)로 거듭 난다. 칼럼은 이 장소(Place)에 대해서 한 층 더 깊숙이 파고 들어 ‘힙 플레이스’와 ‘핫 플레이스’로 세분화하는데, 그 예로 을지로를 든다. 도심에 그저 ‘존재하는 공간’이었던 을지로는 수십 년간 공장들이 모여 공업지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고유의 문화가 부재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들어 개성 있는 가게와 갤러리 등 문화 공간들이 들어서며, ‘힙’한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오는 ‘힙 플레이스’가 되었다. 다시 말해 ‘공간’이 문화의 최첨단을 선도하는 비주류의 성지 ‘힙 플레이스’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힙 플레이스’가 2030세대에게 널리 알려져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미디어나 매체에 노출이 되면 ‘핫 플레이스’로 진화한다고 설명한다. 이런 ‘핫 플레이스’ 또한 주변에 결이 비슷한 문화 공간과 상점이 자꾸 늘어나다 보면 하나의 상권으로 통합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공간에서 맥락이 더해져 ‘힙 플레이스’가 되고, 그것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핫 플레이스’가 된다. 그리고 이것이 확장되고 확장되어 ‘상권’이 된다. 대단히 흥미로운 진화 과정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상권’ 이후에는 무엇일까? 형성된 ‘상권’은 이제 어디로 향할까?
김지연 작가의 도시 진화 과정에 덧붙여 보자면, 공간 진화 과정의 종착지는 ‘센터(Center)’가 될 것이다. 바로 권력이 집약되는 ‘센터’. 공간에 문화와 경험이 더해져 장소가 된다면, 이에 권력이 더해지면 ‘센터’가 된다. 권력이 깔려 있는 ‘센터’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낮추게 된다. 권력이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경복궁 옆 대림미술관을 가는 길은 청와대로 이어진다. 어지간히 철이 없는 아이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을 ‘저쪽 방향’에 청와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발걸음을 돌린다. 권력이 모여 있는 센터에 일부러 다가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부의 상징처럼 이름만 들어도 아는 고급 아파트, 고급 빌라 단지는 어떠한가?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의 권력 뿐만이 아니다. 교육적인 관점, 종교적인 관점에서 권력이 맴도는 공간이 존재한다. 고등학교 때 대학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명문대학교를 방문한 적 있다. 학교 측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어 학생들을 동기부여 하려는 의도였겠으나, 이것은 이미 교육의 권력화에 일조하는 것이다. 명문대에 재학하면 받게 될 사회적 선망의 시선이 어떤 것인 것 역설적으로 몸소 체험하게 했으니 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도 권력을 갖는 센터가 형성된다. 거대한 크기의 교회나 사찰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대규모 종교시설에 갔을 때, 자연스레 경건하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누가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말이다. 인간이 공간이 가진 권력에 짓눌리는 것이다.
이 ‘센터’는 단순히 수평적으로만 확장되는 개념이 아니며, 수직적으로도 확장된다. ‘서울에 올라간다’라는 관용어구를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으레 ‘서울에 올라간다’, ‘지방에 내려간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실제로 위도가 높은 서울에서 위도가 낮은 부산 등지로 내려가기 때문에 그렇게 쓰인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연천, 포천 같은 곳은 어떠한가? 위도가 아닌 고도의 개념으로 봐도 그렇다. 태백산맥에 살고 있는 사람도 서울에 갈 때는 으레 ‘서울 올라간다’ 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과거에 왕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때, 왕을 높이기 위해 ‘올라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즉, ‘권력’ 앞에 위도, 고도 등 공간적/위치적 개념이 무색해진 것이다. 예전에 잠시 British American Tobacco(BAT)라는 회사에 다닐 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었다. 믿거나 말거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이 본사인 BAT는 다른 국가로 진출할 때, 그 국가의 수도에 있는 건물 중 가장 높은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것, 즉 위치를 통해 회사의 파워를 자랑하려는 것이다. 위치는 곧 권력이다. 왜 현대자동차가 제2롯데월드를 뛰어넘는 GBC를 지으려고 애써 노력하겠는가? 공간은 종국에 가서 권력에 종속된다.
이렇게 공간과 권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있다. 바로 시간이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로, 김지연 작가 또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7월호에 ‘시간’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였다. 7월 칼럼에 따르면 결국 시간이란 산업혁명을 맞이하며 보다 효과적이고 생산적이 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분할한 개념이다. 김지연 작가가 쓴 시간과 공간에 대한 두 칼럼을 엮어 읽으며, 시간은 결국 공간의 권력에 종속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력이 모인 ‘센터’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센터에 상주할 수 없다. 이 센터에 접속할 수 있는 특정한 시간대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시간이 공간에 종속되어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학교이다. 우리는 ‘등하교’라는 의례를 통해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공간(학교)에 접속할 수 있다. 적절한 등하교를 위해 취침 시간을 조절해야 하고, 학원 가는 시간을 잘 짜야 한다. 등하교라고 일컫는 공간에 접속하기 위해 시간을 정한 의례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9 to 6’ 체제를 몸에 익히는 의례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만들어 낸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또다른 모습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자승자박'의 현장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