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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북 Jan 25. 2024

따뜻한 집을 만들고 싶습니다

<가끔 집은 내가 되고>, 쓧뚜

나에게 소중한 장소를 꼽으라고 하면 역시 우리 집이다. 내향형 집순이에게는 집이 최고의 영역인 만큼, 나는 집을 굉장히 소중하게 가꾸고 돌본다. 사실, 반은 거짓말이다. 집은 나에게 소중하지만, 열심히 돌보는 일에는 너무나 소홀했다.


감성 유튜버 쓧뚜님의 에세이 <가끔 집은 내가 되고>를 읽고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 책은 슛뚜님의 내 집 마련 역사를 담고 있다. 나 또한 집에 대한 역사가 길다. 집에서 먼 대학교를 다니다 보니 나에게 자취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하숙을 하거나 엄마집에 들어가 산 적도 있지만 세어보자면 성인이 된 후 자취를 한 기간이 훨씬 길었다. 바퀴벌레와 꼽등이가 자주 출몰했던 반지하방부터 내 방 창문이 다른 집 창문과 30cm도 안 떨어져 있던 집, 햇빛이 잘 들고 베란다가 딸린 10평짜리 자취방 등등. 다양한 곳에 머물며 하찮게 여겼던 햇빛의 소중함을 배웠고, 높은 층을 좋아한다는 나만의 취향을 알았다. 또 엄마가 해주는 집밥의 소중함도 느꼈다. 이걸 알기까지 대학생 때부터 결혼 전까지 이사를 수도 없이 해야 했다. 심지어 일 년에 두 번이나 이사를 한 해도 있었다.


자취는 ‘스스로 밥을 지어먹으며 생활함’이라는 뜻이라는데 이전의 나와는 도통 거리가 먼 삶이었다. 내 취향의 물건으로 소박하게 꾸며놓은 나만의 집을 원했건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집에서는 음식을 거의 만들어먹지 않았다. 집안의 가구를 최소화하고 화장실 청소를 매일 했다. 가끔 음식을 먹고 난 후에는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쌓아두지 않았으며, 항상 싱크대볼까지 청소하고 물기도 전부 닦았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난 날에는 그 통까지 깨끗이 닦아냈다.


깔끔하거나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벌레였다. 사실 나는 벌레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주 많이. 매우. 굉장히… 날아다니는 날벌레를 잡기는커녕 집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게 하는 벌레공포증(?)이 나의 자취 생활을 상상 이상으로 힘들게 했다. 매번 가는 집마다 터줏대감처럼 지정된 벌레가 살고 있었고 나는 그걸 1~2년에 걸쳐서 퇴치하는 퀘스트를 받는 기분이었다. 슬프게도 벌레가 없을 만한 신축 원룸은 대학생이 들어가기 부담될 정도로 비싸서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나만의 아늑한 장소를 꾸미는 것은 무리였다. 벌레가 숨을 수 없도록 가구는 최소화했고, 화장실에서 항상 락스 냄새가 남을 정도로 청소했다. 청소기를 돌린 후에는 그 속에서 뭐라도 자랄까 겁이 나 먼지통까지 탈탈 털어 비웠다. 그래서 나는 슬프게도 꽤 오랜 기간 나만의 집을 꾸며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런 내가 벌레와의 독립을 선언하고자 신혼집은 신축 아파트로 골랐다. 덕분에 순식간에 벌레와의 싸움은 해결되었는데, 이제 게으름과의 싸움이 자리 잡았다. 아니, 우울증과 공황까지 함께였다. 많은 이유들을 안고 나는 사실상 신혼집을 방치했다. 집이 지저분해지는 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모든 물건이 밖으로 나와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싱크대의 얼룩은 지워질 생각이 없었으며, 옷은 던져서 쌓아둔 걸 다시 꺼내 입는 지경에 이르렀다. 집이 마치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의 정신도 함께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


정신이 든 건  꽤 최근의 일이었다. 바꾼 약이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급할 때 사용하는 비상약은 복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감긴 눈꺼풀이 열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남편, 가족들, 그리고 집 안의 풍경을 포함한 나 외의 주변 상황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약이 진전을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가족들이, 그리고 집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모습에 받은 충격이 더 컸다.


그 와중에 읽은 <가끔 집은 내가 되고>는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다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쓧뚜님처럼 멋진 취향의 집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소박한 취향을 반영한 집을 가지고 싶었다. 급하게 기억을 더듬어 유튜버 해그린달님의 자막 일부를 적어둔 옛날 메모를 찾았다.


'어떤 집에서 살고 있나요. 잘 가꾼 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나요.

끊임없이 일상을 돌봐야 합니다. 집부터 가꿔야 합니다.'


과거의 나는 이 자막을 읽으며 따스함을 발견했었다. '꼭 집이 아니어도 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 공간을 충분히 가꾸고 그곳에서 행복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나도 따뜻한 공간에서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아픈 와중에 모든 걸 잊고 집도, 나도 돌보지 않고 방치했다는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우울증과 공황의 시기를 돌아볼 때면 언제나 후회뿐이다. 이걸 몰랐지, 이걸 못했지, 같은 생각들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딛고 일어서야 한다. 집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나의 취향을 반영한 공간을 만들고 싶다. 아니,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분명 나의 완치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오늘도 똑같이, 걸음씩.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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