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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Dec 29. 2019

결혼하면 뭐가 달라져요?

요즘 들어 많이 들은 질문이다. 결혼하면 뭐가 다른지, 인생의 다른 관문을 넘어서 흥미로운 세계가 펼쳐지는지 아니면 살풍경한 지옥이 펼쳐지는지를 묻는 것이다. 결혼을 과연 해야 할 것인가? 인생의 동반자를 슬슬 찾기 시작해야 하지 않나? 혹은, 결혼하기로 했는데 이게 과연 해도 될 일인가?라는 의도일 것이다. 딱 그러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묻곤 한다. 제는 그 질문을 들을 때 그냥 링크를 하려고 글을 작성 중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나는 결혼 전후가 세상에서 제일 차이 없는 사람에 가깝다. 나에게 있어서 결혼 후 변화란 세액이 공제되고 청약가점이 높아지며 집안일을 똑같이 안 하고도 좀 더 큰 집이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에 불과하다. 결혼하기 전에도 나는 지금의 남편과 늘상 붙어 다녔고 출근해서 월급을 훔쳤고 퇴근하면 게임을 했고 고양이든 페럿이든 아무 털 달린 놈들이나 마구 쓰다듬었다. 하고 싶은 일은 대부분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아무것도 안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좀 더 솔직하게 내 치부를 드러내자면 현재의 내 싦은 초등학교 때의 내 삶과도 별로 차이가 없다. 내 어린양과 대책 없는 생떼를 받아주는 대상이 엄마 아빠에서 남편으로 바뀐 것뿐이다. "엄마 밥!"에서 "자기야 밥!"으로 바뀐 게 다이다. 과연 결혼에 변화가 필수적인 것일까?


 내가 이토록 변화가 적은 삶을 사는 이유는 나는 경제활동을 하고 남편은 꽤나 뛰어난 주부이면서 우리 취미활동과 가치관과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간섭이 적고 이해심은 많은 부모님들을 두었고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할 때 수많은 참견쟁이들이 간섭을 해대기 시작했다. 결혼 직전에는 맞벌이가 최고라며 의사 남편을 만나라고 들볶았고 결혼 직후에는 나 같은 기센 여자를 만나 남편이 불쌍하게 집에 있다며 들볶았다. 직전에는 여자야 결혼하면 좋지 남자들은 불행의 씨앗이라고 한 마디씩 했고 직후에는 애를 낳아야 그나마 결혼이 빛을 발한다고, 이혼하고 싶을 때도 애 때문에 못할 거라고 조언을 해댔다. 하지만 나는 가끔은 가장 보수적이며 끊임없이 집안일을 만들어서라도 해대는 조선시대 여인 같고 가끔은 눈밭을 나뒹구는 강아지 같은 남편에 만족했고 남편도 내 욕심 없는 벌이나 환장할 만한 변덕과 집에서 나태하게 늘어져있는 작태에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사람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도 싫어하고, 공공장소도 싫어하고, 게임을 하지 않는 유부녀들과 얘기하는 법도 없고, 각종 병원과 검진을 매우 무서워하고, 털이 없는 생물을 비선호하는 나는 가족계획도 하지 않았다. 식당 티비에서 예능만 틀어져 있어도 그 사람 말소리에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내가 우리를 닮으면 수다스러울 것이 분명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보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모든 것이 보상되고 전에 없을 행복감, 만족감과 지상천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나를 설득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반대로 카페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되든 내가 커피를 2잔 마시고 책을 덮고 일어나는 순간까지도 남편 험담과 결혼에 대한 후회를 하는 사람도 역시나 많았다. 자식 미운 사람은 없다고 낳는 순간 예쁘다고 했지만 내가 근무하던 응급실에는 소주병 파편으로 아들을 다치게 하는 아빠도, 갓난아기를 대충 구급 베드에 던져놓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남편을 폭행하는 엄마도 있었다. 세상에는 예외가 너무 많고 냥바냥 인바인이어서 별로 귀담아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혹시 좋아질지 몰라서 무턱대고 애를 갖고, 아이가 위태로운 부부관계를 지탱해주는 끈이기 때문에 하나 낳는다는 식의 가치관은 나와는 안 맞았다. 맞다. 나는 경제적인 문제는 고려도 안 했다. 내 월급의 20%를 버는 사람도 얼마든지 잘 키워내기도 한다. 2030의 힘든 현실 핑계를 댈 마음은 없었다. 아이를 안 낳을 거면 왜 결혼을 하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애초에 결혼은 남녀가 하는 건데 어떻게 그런 질문이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어 대답하지 못다.


 어쨌든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내가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이다. 변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혼초에 나는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유니콘 같은 존재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변화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있다는 착각이 중요한 것이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인터넷 글들은 나를 허상에 감정 이입하게 했다. 다른 사람의 기대치는 신경을 안 쓰고 싶어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예를 들면, 자꾸 시댁에서 이 정도는 받고 결혼해야 한다, 남들은 그렇다, 열쇠 세 개 받았냐고들 물어봤다.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에 오히려 충실히 따라야 한다면, 나는 남자의 역할이니 집도 한 채 해왔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가?


 시댁에서 이러이러한 말을 하면 자식을 감싸는 것이다, 시누이는 적대 관계다 따위의 같은 말과 글은 너무나 다양해서 세상 모든 언사를 포괄할 수 있을 것 같은 정도였다. 물론 일견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이때껏 키워놓은 자식인데 그럼 만난 지 1년 된 며느리 편을 들랴? 당장 남의 집 고양이가 우리 집 냥이에게 하앍질 한 번만 해도 살짝 미우려고 하는데 당연한 일 아닌가.


 또한 그냥 오해인 경우도 있다. 이것저것 계산하고 숨은 의도를 지닌 채 말하는 여자들은 몹시 많지만, 가끔은 그들조차도 저의 없이 말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있지도 않은 저의를 추측하는 과정은 그것보다 더욱 아프다.


 세상에 인간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이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개별적인 특질이 전체를 좌우한다. 쉽게 말해서, '상사'란 어떤 존재냐고 묻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어떤 기업의 상사는 공자의 환생 같을 수도 있고 어떤 상사는 막장드라마에나 나오는 개차반 같은 놈일 수도 있고, 어떤 상사는 평범한 반면에 어떤 상사는 반 세기도 더 된 고정관념에 찌들어 있을 것이다. 어떤 상사는 나만큼이나 방임주의고 어떤 상사는 성희롱을 일삼겠지. 세상에 상사들이 한 둘도 아닌데 어떻게 뭉뚱그려서 설명하랴?


 결혼만큼은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 못된다. 열 쌍의 커플에게는 열 개의 서로 다른 결혼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절대로 남이 추측할 수가 없다. 내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는 그 어떤 명의도 정확히 모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는 초월적 존재만이 안다. 남의 이야기는 재미로만 들어야지 참고할 사항이 못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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