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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하는양 Jul 16. 2020

들리는 비판과 들리지 않는 비난을 동시에 들을 때

잘못된 방어기제 - 치환과 수동공격성

나에게는 상당히 생생한 '원대한 망상'이 있다. 그 망상은 맞는 말과 비난이 가득한 말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형체가 있고, 함께 사는 가족이 있고, 말투, 눈빛 모든 것을 지닌 살아있는 존재다.


망상이 나에게로 다가와 부딪치면 나는 피가 닳는 대신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본다.


* * *


대충 혼자 떨어져서 잡생각이나 하며 지내던 나에게 대학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분명 그 전에도 많은 실수를 했으리라 짐작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실수는 설거지였다. 첫 엠티에서 식사를 하고 설거지 감이 생겼는데 신입생 중 아무도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배에게 다 같이 혼이 났을 때 그때 내가 가지고 있었던 다른 망상, 즉 엄마가 '그러니까 네가 이기적이란 소리를 듣는 거다, 사회성이 없다, 싹싹하게 나섰어야지, 평소에 일을 안 도우니 자신감이 없지, 공주병이냐' 같은 말을 쏟아냈다. 그 망상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날 비난했다.  사실 그 후에도 생각은 했는데 나서서 '제가 할게요' 같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뭐 마려운 개새끼 마냥 뒤에서 얼쩡거렸던 몹쓸 기억이 난다.


나는 물을 마시러 갈 때 다른 사람의 컵을 챙겨 오는 일을 하지 않았다. 망상이 아닌 현실의 엄마가 지적했을 때, 내가 멍 때리는 동안 많은 실수가 진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항변했지만(그것도 장황하게, 누구나 질리도록) 속으로는 울고 싶었다. 또 낙제점을 받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외워야겠구나 생각했다. 수칙을 만들어서 강박적으로 지켜보면, 나에게도 상식이라는 게 생기겠지. 오산이었다. 나는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생각 없이 정해진 것만 지키고 그 외의 것은 보지 못하는(게다가 망설이느라 더럽게 느린) 구닥다리 기계가 되어갔다. 치고 좌절해서 블로그에 글을 쓰면 이번엔 망상이 아닌 부모님이 전화해서 '드디어 네 모자란 점을 알았구나-'하고 말했다. 제발 일기는 보지 말았으면. 그럴 거면 일기를 공개적으로 쓰지 말아야지. 아니 보고도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건가? 나 자신도 분열했다.


그때 동기 중에 날 상당히 미워하던 친구가 있었다. 미워하는 것은 정당했다. 나는 누구나 미워할 만한 수많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정도가 좀 심했을 뿐이다. 말끝마다 '센스'를 강조하고, 예의, 상식과 같은 단어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사회성에 다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잘 섞이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어 했다. 딱히 내로남불이라고 할 만한 점은 없었다. 남을 힐난하고 괴롭히는 것만큼이나 자기 자신도 괴롭혀댔다. 윗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잔돌리고 이름을 외우는 것도 잘 못하고, 건물이 하나밖에 없는 병원에서 길 따위를 잃고, 애매하게 몇 분씩 지각하고 옷도 제맘대로 입고, 일처리도 깔끔하지 못한 나는 상당히 적절한 증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은 인턴 때쯤 이번엔 일처리가 깔끔하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시달리며 깨달았다(그리고 내가 당한 것만큼 다른 이에게 엄격하게 대하는 내 모습을 보며 위화감과 죄책감과 아주 그릇된 만족감을 느꼈다).


사람이 변화가 어려운 것은 첫째로는 인정하기 어려워서이고, 둘째로는 인정한 후 우울감을 극복하기 어려워서이고, 세 번째로는 노력에 비해 성과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그 끝없는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나는 같은 사고와 행동을 강박적으로 되풀이했다.


그 아이는 나에게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끝없이 화를 냈고 술자리에서는 죽여버리겠다며 술잔으로 상을 내리쳤다. 눈을 마주치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만큼 피했고 수년이 지나도록(망할 의대는 졸업하는 데 최소 6년이나 걸린다) 인사를 받아 주자도 않았다. 당직을 서면 소파를 사용하게 해 주자고 하다가도 내가 당직 후에 누우면 남 생각 안 하고 자리 차지한다고 코앞에서 큰소리로 힐난했다. 그렇다. 이것은 그저 피해자인 척하는 나의 입장이다. 우울증 약을 먹고 매일 자살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괴로워하는 정도만을 반영할 뿐 내가 끼치는 피해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나는 반복되는 우울감에 빠져 과제 알림을 듣지 못했고, 스트레스 쌓인다며 자정까지 게임하다 부랴부랴 과제를 해치워서 조별 점수를 깎아먹었고, 사람들 얼굴 보기 무섭다며 다른 곳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고, 안이하게 생각하고 제대로 실습 일정을 전달하지 못했고, 아침 강의에서 졸아 버렸다. 내 실수는 모조리 빠져있었다. 공격하고 싶지만 공격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에 대한 대가를 너무나 혹독하게 적용했다 한들 내 실수 또한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렸고 그에 대한 마음까지 직면하기는 십여 년이 걸렸다.


씻다가도, 잠을 자려다가도, 술을 마시다가도 문득 생각났다. 지금 나를 만나도 그 정도로 날 미워할까. 난 그 사람의 기준에서 언제까지나 미달인 사람일까. 난 당시 그냥 다 그 아이의 기준에 맞춰 보고 싶었다. 근데 그 노력은 아무도 몰라 주었다. 솔직히 나 자신도 잘 모를 정도였다. 디시 만나면 여전히 모두의 앞에서 날 증오하는 티를 낼까? 궁금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


처음엔 졸업하는 날 팰 생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어딘가로 유인해서 물리력을 행사하고 싶었다. 아무리 성별 차이가 있더라도 해를 끼치고 싶은 욕구는 내가 더 클 테니 상관없을 것 같았다. 선빵 필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구타가 행해졌는지 모른다. 그다음에는 살인청부를 하고 싶었다. 그 사람의 부고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는 그 사람의 실패를 보고 싶었다. 걔가 사람을 잃었다, 싸웠다, 실연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사회에 나가서도 실패하고 연애도 못하다가 초라하게 늙어가는 꼴을 보면 바로소 내 인생을 살 생각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잘도 일어난다.

그 사람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 근무를 했다. 졸업한지도 8년이 지났고 나는 그동안 꽤 많은 일을 겪었다. 간혹 그 아이는 내 원대한 망상이 되어서 나를 욕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내가 받아들여야 할 자기 발전의 계기겠거니 했다. 가끔 발끈했지만 다행히 망상이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망상이 현실이 되어서 내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새로 온 내과 과장이라며 인사하러 왔는데 그 사람이었다. 몇 초간 서서 서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인사했다. 소개해 주러 온 과장님께는 아는 사이라고 말했다. 잘 아는 사이였다. 몇 년을 미워해 온.


첫 회식 때 나는 실망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흰자위를 드러내며 고개를 숙인 채 남을 노려보듯이 얘기하지 않았다. 결혼도 했고 평범하게 행복해 보였다. 남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레지던트 때 들었던 것과 달리 타과에 깐깐하게 구는 것도 없었다. 모난 면이 없어져 버렸다. 긴 세월 동안 미워해 온 내가 허탈해졌다. 그리고 한편으로 생각했다. 대신 이 망상은 끝이 나겠구나.

 

그런데 이 병적인 방어기제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서 옛날의 그 아이와 현재의 그 사람을 분리해 버렸다. 내 망상은 여전히 예과생이고 사람을 노려 보고 거침없이 날 비난해댄다. 그리고 한 가지 능력이 더 생겼다. 이제 빙의도 한다.


최근에 게임을 하다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비슷하다고 하기엔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그림자를 계속 느꼈다. 남에게도 본인에게도 엄격하고, 예민하고, 내 잘못을 망설이지 않고 직선적으로 지적하는 점은 비슷하긴 했다. 하지만 전달 방식도 달랐고 기준도 훨씬 합리적이었다. 그 외에도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런데도 난 그냥 예전의 그 아이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망상은 이제 타인과도 겹쳐 보인다. 역시 날 못마땅해하는 것 같아. 날 싫어하는 게 분명해. 그건 사실 깐깐한 사람을 싫어하는 내 마음의 투사 아닌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나?


어쨌든 난 지적받고 있어. 그리고 그건 다 이유가 있으니 고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과제가 생겼다고 생각이 되었다.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실패할 때마다 화가 났다. 도대체 어떻게 더 해야 하는 거야? 얼마나 더 괴로워야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에게 느껴진 두 감을 한 사람에게 투영했다. 망상은 또 다른 망상을 불러일으켰다. 오기가 생겼고 좌절감도 동시에 생겼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끊임없이 강요받고 있었다.


'이번엔' 해낼 수 있어. 변했으니까. 서른 넘도록 아무것도 고치지 못한 채 낙오자가 되었다고 인정할 순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난 잘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난 틀렸다고, 나는 길다면 긴 세월을 변하지도 않은 채 피해를 입히고 배려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망상은 앞모습은 그 아이인데 뒷모습은 꼭 엄마를 닮았다. 근데 자세히 보면 나 같은 생김새도 하고 있다.


때로는 미움받는 게 당연한 사람도 미움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미움받을 용기는 뻔뻔함과 자기반성의 부재 역시 불러온다.


뭐가 두려운 걸까?

잘못된 삶을 인정하는 것?


나는 끝맺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난다.


하지만 내 얘기는 결말이 없다. 이 망상에서 분리된 작은 망상은 오늘은 일기까지 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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