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말하는양 Jan 03. 2024

수많은 건강 상식들은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

부제 : 아무말대잔치

나는 참 진료와 안 맞는 사람이다. 

의사라면 나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단단하고 흔들림없는 목소리로 환자를 대하거나, 아니면 한없이 친절하게 설명하고 환자 말을 따르거나 해야 일이 쉽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는 까칠하고 겉으로는 친절하니 환자들이 건강상식이라며 아무 말이나 해대는 걸 잠자코 듣고 있지를 못한다.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을 해야 하고, 잘못 알고 있으면 설득될 때까지 말해야 하고, 타원에서 가져온 건강검진 결과지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짚어줘야 직성이 풀린다. 


그럼에도 그게 괜찮기만 하다면 나는 친절한 의사로 남을 수 있을 텐데,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기 때문에 어떻게든 감정을 풀어야 해서 오래 일을 하지 못한다. 이직을 하든지 파트타임을 하면서 투잡 쓰리잡을 하든지... 환자를 안 보는 시간을 늘려야만 삶이 영위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만 얘기해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늘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게 너무 지쳐서 AI가 가정의학과 의사를 대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실행에 옮기고 싶어서 알고리즘도 짜 보고, 비대면진료와 혼합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고, 특허도 신청하려고 변리사도 만났다. 근데 법적인 규제를 도저히 우회할 방법이 없었다. 


답답해서 브런치에 혈압약은 마약이 아니라고 외쳐도 보고, 카드를 인쇄해서 전부 오는 사람들에게 건강상식을 담아서 배부할까 생각도 해 보고, 그런데 우연히 다른 의사선생님의 진료를 듣게 되고 포기하게 됐다. 


다른 분들은 그냥 좋게 좋게 상식선에 맞춰서 설명하시고 계셨다. 심지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고명하신 분들이. 그래, 나 따위가 뭐라고 세상의 상식에 맞서 싸우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소음인은 두유가 안 맞아서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왔냐고 다섯 번씩 물어보면 그냥 한의원에 보내자. 


그럼에도 가끔씩은 이 많은 상식들이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궁금하다. 


예전에는 항히스타민제를 쓰고 콧물이 (농축돼서) 노란색이 됐다며 '당장 항생제 내놔라 이 돌팔이야'라고 환자가 외치면 설명을 했었다. 콧물의 색과 세균성 감염과는 그다지 관계가 깊지 않다고. 약을 썼으니 들은 건데 그걸로 화를 내시면 되겠느냐 등등... 그런데 그때의 나는 사람들이 지식을 원하는 게 아니라 욕구를 해소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냥 항생제를 먹어서 내가 내 몸에 최선을 다했다는 기분을 얻고 싶은 거지 과학지식을 알기 위해 병원에 온 게 아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진료 자체가 싫어졌다. 의사가 아니라 점술사가 된 기분이었다. 


오늘 위내시경을 하려는데 제가 위암일까요? 


이 미칠 듯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받으면서, 아 내가 익혀야 할 것은 주역과 타로였구나. 차라리 그냥 MBTI로 진료하는 게 낫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모르니까 위내시경을 하려는 거예요. 의사가 그것도 몰라요? 모르죠 점은 칠 줄 모르니까. 아 INTP이시니 위궤양이겠네요. 물론 그따위로 대답할 수는 없다. 나도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직장은 소중하고 환자도 나쁜 뜻이 아니었을 테니까. 


-> 혈압이 기계로 재면 높아서요. 직접 더 정확하게 재 주세요. 


심지어 의사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왜냐면...... 해당과가 아니면 졸업하고 그쪽 논문을 안 읽으니까. 지식은 매일같이 쏟아져나오고 의사라고 전문분야도 아닌 논문까지 하나하나 읽고 있을 시간은 없다. 물론 나처럼 진료는 반나절만 하는 의사는 화장실에서 싸면서라도 읽을 수 있기는 하다.  

 아무튼 기계가 의료진보다 정확하게 된지는 몇 년 됐다. 와치로도 혈압을 재려는 시도가 있는 판국에 아직까지 못 따라잡았을 리가. 의사가 쟀더니 혈압이 훨씬 낮게 나왔다면, 난 그냥 의사가 잘못 쟀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 거품뇨가 나왔는데요. 약 주세요. 


시대가 바뀌었다. 단백뇨가 의심되면 스틱검사를 하면 1분이면 나오고 더 정확한 검사도 검사실이 있는 병의원이면 20분 내에 나온다. 굳이 꼭 소변을 눈으로 째려 보면서 내 눈이 더 정확하다고 우겨야 하는가. 1960년대에야 병원마다 검사를 할 수 없었으니 눈으로 봤다. 그다음 진료의뢰서를 쓰고, 대학병원에 보내고.... 그런데 이런 시대는 지났다. 청진기보다는 CT가 백 배는 정확하고, 눈으로 보는 성상보다 검사가 백 배 정확하다. 그런데도 구시대의 상식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때문에 여전히 쇼를 한다. 굳이 덜 정확하게 진료실에서 혈압을 재고, 현재에는 의미가 없어진 장황설을 들으면서. 


진료는 과학이 아니다. 서비스업이고 고객응대고 친절하게 마음을 풀어주는 행위이다. 과학은 지금도 AI가 더 잘한다. 프롬프트만 기가막히게 짜면 이미 가이드가 명확한 수많은 질환들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정확하게 진료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다만 환자들의 말은 정형성도 없고, 문화적인 편견도 많이 담겨있고,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희안한 일들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백퍼센트 대체가 '아직은' 어려울 뿐(x-ray 찍으면 금침이 20개씩 나오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심심찮게 나오는 곳이 한국이다. 이것을 미국 가이드라인에 넣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이다. 언젠가는 이 모든 일을 기계가 해 주겠지. 초음파는 술기가 프로그램화하기 복잡해서 오히려 오래 걸릴 거고. 봉합이나 간호사 술기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앉아서 하는 진료는 머지 않았다. 이권 문제, 인권문제, 보호자 및 환자와의 의사소통의 문제, 법적 문제 등등만 해결되면 된다. 늦어도 내가 죽기 전에 볼 수 있지 않을까.    


항상 고민중이다. 

날 AI가 대체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고 심지어 그런 세상이 오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내가 뭔가 하고 싶은데. 그럼 나는 일자리를 잃을 거고...... 



 

매거진의 이전글 드디어 바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