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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Apr 30. 2022

김밥

어릴 때 김밥은 특별한 메뉴였다. 소풍가는 날이나 주말에 어쩌다가 등장하는 음식이었다.


김밥용으로 썰어 나오는 단무지나 햄도 없었던 때니까 일일이 재료를 다듬고 요리해서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자주 먹기 더 힘들었다. 이번 주말에는 김밥을 싼다고 엄마가 선포하시면 모두들 기뻐했다. 김밥을 싸고 써는 엄마 옆에 서서 주워먹는, 재료 가닥이 툭툭 튀어나온 김밥 끄트머리는 희한하게 맛있었다.  


그러다 막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 김밥 전문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던 기억이다.


떡볶이나 라면같은 다른 분식 메뉴도 팔았지만 참치김밥이니 김치김밥같은 식으로 재료에 따라 이름도 다른 김밥을 여러 종류 내놓고 파는 곳들이 등장하면서 아무 때나 사먹는 음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요네즈에 참치를 버무려서 깻잎에 싸서 먹는 참치김밥을 처음 먹어보고 김밥에 이런 재료도 넣을 수 있는 거구나 깜짝 놀라기도 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자 김밥은 제일 간편하게 한 끼를 때우는 메뉴가 되었다.


자리를 비워가며 식사를 하러 나가기 어려운 때면 자리에서 김밥 한 줄 까먹으면서 일처리를 하곤 했다. 점심에는 자주 있는 일이었고 저녁에도 종종 그럴 때가 있었다. 그 즈음 김밥은 그냥 적당히 영양소도 채우면서 맛도 그럭저럭 먹을 만한 제일 만만한 무언가였던 것 같다. 딱히 맛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맛없어서 못 먹겠다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다 요즘에는 내가 직접 김밥을 싸고 있다. 가끔은 이리저리 레시피를 뒤져서 유명한 곳의 김밥을 얼추 재현해 보기도 하고, 또 가끔은 그냥 마트에서 집히는 대로 재료를 사다가 적당히 싸기도 한다. 처음에는 재주가 부족해서 김밥 재료가 한쪽으로 쏠리기도 하고 밥을 너무 많이 집어넣거나 반대로 재료를 너무 많이 집어넣기도 해서 균형을 깨뜨리기도 했지만 점점 솜씨가 늘었다. 덕분에 요새는 열 줄 정도는 그럭저럭 쌀 만 하다.


그래도 김밥 한 번 싸자면 귀찮은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어째서 계속 김밥 싸기에 정진하고 있느냐면 김밥을 싸는 동안 옆에서 살그머니 뻗어나오는 조그만 손 때문이다.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김밥에 들어가는 햄이나 계란, 게맛살 같은 재료를 좋아하는 우리 집 어린이는, 내가 부엌에 서서 김밥을 싸고 있으면 살금살금 옆에 다가와 속재료가 줄지어 쌓인 쟁반으로 손을 뻗는다. 거기서 자기가 좋아하는 재료 한 줄을 살짝 집어다가 입에 집어넣고 도망가는 것이 김밥 싸는 날 어린이의 조그만 기쁨인 것이다.


뒤늦게 눈치챈 척 하면서 이렇게 자꾸 가져가면 어떡하니, 하고 잔소리를 할 때도 있지만 입을 오물거리면서 방긋방긋 눈웃음을 치며 도망가는 동그란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만다. 우리 집 일곱 살 어린이도 엄마가 진짜로 무어라 하는 건 아닌 것을 알아서 조금만 있으면 또 살그머니 다가오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배가 절반쯤은 차버려서 정작 김밥 자체는 얼마 못 먹는 사태가 일어나지만. 어쨌든 김밥 속에 섞여 평소 어린이가 싫어하는 시금치나 부추도 쉽게 먹였으니 나는 그대로 만족한다. 희한하게 김밥을 싸서 먹였을 때만 느껴지는 묘한 충족감을 느낀다.


몇십 년 전 내가 어렸을 때 부엌에 와서 김밥 끄트머리를 집어먹는 나와 동생들을 보면서 나의 엄마도 비슷한 감상을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몇십 년에 걸쳐 세대가 바뀌며 김밥을 둘러싼 감정도 한 바퀴 돌아 이어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엄마는 별 생각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어렸던 내가 김밥 끄트머리를 집어먹을 때의 마음과 잽싸게 김밥 재료를 집어가는 통통한 손등을 보는 마음은 아주 많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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