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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Apr 29. 2022

먼 곳에서 먹는 찌개

학부를 다니던 시절, 운좋게 소정의 장학금이 나오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었다. 지정된 학교는 일본의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츠쿠바라는 도시에 있는 대학. 지금은 다르지만 내가 갔던 때만 해도 전철이 들어가지 않아 외떨어진 동네라는 느낌이 많이 나는 곳이었다.


원래는 농촌이었던 지역에서 박람회를 하고 연구 단지를 조성하느라 세운 계획 도시라 학교는 아주 크고 연구소도 많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성장한 주거 지역이 부족해서 오래 묵은 상권이 없었다. 시외버스가 들어오는 '센터' 라는 곳에 조그만 백화점이 포함된 쇼핑몰이 하나, 거기서 한참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면 롯데마트나 이마트 같은 느낌의 큰 마트 하나, 또 다시 한참 가다 보면 드럭스토어가 하나...


낮은 높이의 건물들 혹은 아직 개발되지 않아 텅 빈 들판 사이에 띄엄띄엄 대형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서 있는 모습은 사실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교외 지역 느낌을 더 풍겼다. 공원이나 녹지는 많았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동네는 아니라 어두워지면 인적이 뚝 끊겼다. 학교 캠퍼스 안에 숲이 있었고 그 안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에 얽힌 괴담도 몇 개나 전해지고 있었다.


좋게 말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해 썰렁한 동네였다. 차가 있었다면 조금 나았을 텐데, 나와 친구들은 가난한 학부생들이라 중고품 가게에서 구입한 자전거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기 때문에 주말이 되어 도쿄에 나가지 않는 이상 그 지역 안에서 별달리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기숙사에서 놀았다. 대학 기숙사 답게  낡고 더러운 곳이었지만 모든 학생이 독방을 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처음 갔을 때 친구들은 거의 나처럼 한국에서 교환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이었다. 나같은 학부생들도 있었지만 대학원생 언니들도 있었다. 나이 차이는 조금씩 있었지만 별달리 할 만한 일이 없다 보니 우리는 다같이 자연스레 친해졌다. 돌아가며 누군가의 방에 모여 맥주나 음료수를 마시면서 아주 늦게까지 온갖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답답해지면 또르락또르락 슬리퍼를 끌고 다같이 나가 기숙사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가끔은 그런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보통 누군가가 집에서 소포를 받을 때였다. 어수선하게 살고 있을 게 틀림없을 자식을 위해 집에서 이것저것 싸서 보내 준 상자 안에는 보통 터지지 말라고 혹은 터졌을 때를 대비해 꽁꽁 싸맨 김치가 한 팩 정도는 들어 있었다. 보통은 혼자 사는 학부생이 그 김치 한 팩을 쉬기 전에 다 해치울 수가 없으니, 일단 받으면 김치찌개나 김치전골을 만들어서 절반 정도는 해치우고 남은 분량을 천천히 먹었다. 반대로, 집에서 받은 김치가 위기에 처하면 더 위험한 상태가 되기 전에 비슷한 요리를 만들어서 해치우기도 했다.


사실 그 맛은 그 때 그 때 달랐다. 조달되는 식재료와 그 날의 요리사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멀건 김치국부터 꽤 훌륭한 찌개까지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등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했을까? 너덧 명이 앉기에도 비좁은 기숙사 방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짝이 안 맞는 그릇에 각자 적당히 음식을 떠먹고 내일의 일은 나몰라라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시간이 기억의 핵심이다. 그 때 그 순간 우리는 진짜 가족보다도 더 가족같았는데, 오히려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기억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 돌아오고 몇 년이 지난 후에는 더 먼 곳으로 또 다른 공부를 하러 가게 됐다. 그 즈음에는 나이도 경험도 더 쌓여 진짜 그럴싸한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곳에서도 비슷하게 유학생들끼리 도란도란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시간이 있었지만 너덧 명이 앉기에도 비좁은 그 방에서 복닥거리며 먼 곳에서 혼자 살 때 마주하게 되는 여러 감정들을 잊어버리게 되던 그 시간이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았다. 그 때 이미 나는 너무 나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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