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귤 Apr 29. 2022

미트볼과 장조림

엄마는 예전부터 여행을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명승고적을 탐방한 여행기와 화보집이 즐비했다. 낯선 나라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도 자주 보았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을 때 (이렇게 내 연식이 드러나는군!) 엄마아빠는 가능한 빨리 유럽으로 가는 패키지 여행 상품을 구입했다. 아직 어린이였던 나와 동생들은 두 분 할머니가 돌봐주시기로 했다. 원래 한 분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계셨는데, 어떻게 된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한 분 할머니가 잠시 오셔서 함께 지내게 되신 것이다.


당시에는 그런가, 하고 넘겼던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두 분 할머니는 서로 너무나 안 맞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아빠의 어머니인 아빠 할머니는 아직 일제 시대였던 청춘 시절 홀홀단신 만주로 건너가 간호 학교에 다니고 친척이 운영하는 의원에 취직했다가 할아버지와 연애 결혼을 했던 불 같은 성품의 소유자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독립적이고 멋진 분이셨지만 뭔가에 꽂히면 꼭 그걸 지금 당장 해야만 했다. 손주들을 돌봐주러 오셨다가도 어떤 일이 생각나면 바람처럼 구름처럼 메리 포핀스처럼 사라져 버렸다.


반면 엄마의 어머니인 엄마 할머니는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농경 정착민의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안정을 추구하며 변화를 싫어하셨고 나름대로 자식들을 사랑하여 막내딸인 우리 엄마가 SOS를 치면 당장 달려와서 손주들을 돌봐 주셨지만 재산은 큰아들에게만 상속하는 옛날 분이셨다.


그런 두 분은 서로를 자연스럽게 미워하셨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긴장은 어린 시절의 나를 내내 괴롭혔던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덕분에 지금 나는 맞벌이 가정의 어린이는 전문적인 기관의 돌봄을 받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아빠의 해외여행이라는 대사건 때문에 잠시 두 분이 합체하셨던 것이다.


두 분은 성품이 다른 만큼 요리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아빠 할머니는 내키면 요리를 하셨는데 그 '내키는' 순간이 자주 도래하지는 않았으나 일단 한 번 찾아오면 그 스케일이 거창했다.  아기가 목욕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양푼에 가득하게 잡채를 하거나 기름을 한 통 다 쏟아서 약과를 잔뜩 만들었다. (집에서 튀겨서 즙청한 약과보다 맛있는 간식은 지금도 생각해내기 어렵다.) 잡지나 요리책에서 본 신기한 다른 나라 음식을 과감하게 시도해 보는 사람도 언제나 아빠 할머니였다.


반면 엄마 할머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때 그 때 만들어야 하는 저장 음식을 충실하게 만들어냈다. 절기에 따라 메주콩을 삶는 것부터 시작해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갔다. 늙은 호박을 사서 콩을 잔뜩 넣고 호박 범벅을 만들고, 김장 철에는 배추를 가득 쌓아놓고 김치를 담갔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입맛 없을 때 먹기 좋도록 오이지를 담고 장조림을 만들었다.


엄마아빠가 집을 비웠던 약 2주 동안 이 두 할머니가 어떻게 부엌 살림을 조율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강 짐작하건대 엄마가 만들어 놓고 간 반찬이나 엄마 할머니의 저장 음식, 밖에서 배달 시킨 짜장면이나 잔치 국수 같은 것으로 한 끼 한 끼 때우는 한편으로 아빠 할머니의 별식도 먹으면서 지냈을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엄마아빠가 돌아오는 날이 다가왔다. 아빠 할머니는 엄마아빠의 귀국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새로운 별식을 준비했다.


아빠 할머니는 고기를 다지고 양파와 야채도 다졌다. 반죽을 만들고 치대서 동그란 경단처럼 빚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미트볼이라고 알려주셨다. 그걸 프라이팬에 대굴대굴 굴려가며 구운 다음 산적을 만들 때 쓰는 긴 꼬치에 미트볼을 꽂았다. 그리고 그 꼬치들을 다시 사과에 빼곡하게 꽂아서 내는 음식이었다.


그렇게 만드는 미트볼 요리는 사실 지금까지도 좀 낯설게 느껴진다. 만일 존재한다면 아마 반죽을 꼬치와 사과에 다 꽂은 다음 통째로 오븐에 넣어 구워냈을 것 같다. 일단 구워낸 미트볼을 꼬치에 꽂으면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서 떨어지기 쉬울 것 같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2주 내내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양식을 먹다가 갓 집에 돌아온 엄마아빠에게는 미트볼보다는 김치찌개나 된장찌개가 훨씬 더 반가운 메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아빠는 아마 그 미트볼 요리보다는 엄마 할머니의 오이지나 장조림을 더 맛있게 드셨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사과에 꽂힌 미트볼 꼬지는 나와 동생들이 더 신기해 하면서 뽑아 먹었을 거 같다.


두 분 할머니들은 여러 의미에서 주양육자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고, 그 때문에 나는 보통 할머니들이라면 떠올리는 무조건적인 애정보다는 좀 더 다층적인 감정을 두 분에게 모두 품게 되었다. 그것이 사랑인지, 애증인지, 이름을 붙이기 너무 복잡한 또 다른 감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두 분은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고 지금도 나를 종종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예컨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아니 그런데, 엄마 할머니는 정말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셨던 걸까? 정말 모험심이 별로 없었던 걸까? 그렇다면 우리 엄마의 이 여행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온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 답은 영영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이전글 아빠의 카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