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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May 03. 2022

그것은 계란밥

옛날 내가 어렸을 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라는 제목의 책이 유행했다. 문득 생각나서 찾아보니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많이 팔렸던 책인 모양이다. 저자는 성공학 강사로 유명한 미국인 두 명인데, 이런 저런 경로로 알게 된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잘 간추려서 엮어낸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여기서 갑자기 그 경험담을 공유해 준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로얄티를 주긴 했던 건지 궁금해지지만 아무튼 그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어딘가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안좋거나 그냥 모든 것이 다 귀찮을 때 먹으면 마음이 따스해지는 간단한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 '소울 푸드' 라고 잘못 알려지게 된 이유 중에 이 책의 제목도 들어가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훗날 다 자란 다음 그런 음식을 가리키는 옳은 말은 '컴포트 푸드 (comfort food)' 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도 어쩐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요리를 가리키는 '소울 푸드 (soul food)' 라는 말이 왠지 더 익숙하게 느껴진다 고백해야겠다.


그래서 나의 영혼을 위한 컴포트 푸드는 무엇이냐면 바로 계란밥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란볶음밥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텐데, 내가 아는 계란밥은 중화음식점에서 나오는 스타일의 볶음밥과는 조금 다르다. 그냥 밥에 계란을 깨넣어 뜨겁게 데우면서 볶으면 끝나는 초간단 음식이다. 이 음식은 내가 가장 먼저 할 줄 알게 된 음식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 입맛이 없으면 엄마에게 해달라고 했던 음식이며, 종종 내가 남편과 아이에게 만들어 주고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재료도 조리법도 단순한 만큼 맛도 실로 단순해서 맛없기가 쉽지 않은데 사실 나는 어릴 때 이 요리를 잘못 만든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이었을까, 친구를 집에 놀러오라고 해서 간식을 만들어 준다고 하며 계란밥을 나름대로 자신있게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도 분명 여러 번 만든 적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신있는 요리였는데 희한하게도 나보다 먼저 한 숟갈을 뜬 친구는 어쩐지 생각보다 맛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며 조심스러운 말투로 평가를 내렸다. 


대체 왜 맛없다고 하지? 자존심이 상한 채로 내 몫의 계란밥을 맛보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친구에게 요리를 해준다는 흥분감에 젖었기 때문인지 간장도 소금도 넣는 것을 홀랑 잊어버렸던 것이다. 아무리 계란이 훌륭한 식재료라지만 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밥과 계란의 조합은 환자식 비슷한 것에 가까웠다. 친구에게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뒤늦게 소금을 꺼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은 요리를 마무리하고 식탁에 내기 전 반드시 간을 봐야 한다는 뼈아픈 기억을 남겼다. 물론 그 뒤로도 비슷한 실수를 여러 번 했지만 적어도 계란밥을 만들 때 간하는 걸 잊은 적은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레시피가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기도 했다. 먼저 날계란을 잘 풀어서 밥을 담가 마리네이드 하듯이 계란물에 밥을 불려 놓은 게 일단 포인트다. 여기에 계란 비린내를 없애고 싶으면 미림 같은 조미료를 약간 넣고 소금이나 간장을 살짝 더한다. 볶을 때는 약한 불에 계속 저어서 뒤적여야 하는데, 반드시 계란이 다 익기 전에 불을 끄는 것이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다. 아직은 좀 더 익혀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불을 꺼야 여열로 계란이 익으면서 마무리되어 적당히 촉촉하면서도 보드라운 계란밥이 완성된다. 


남편도 아이도 뭘 먹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계란밥이 그 드문 경우에 속한다. 갓 볶아서 따끈한 계란밥을 구운 김에 가볍게 싸먹으면 실로 단순하지만 따뜻한 기분이 밀려오는 듯했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래도, 남편도 아이도 비슷하게 느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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