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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Feb 04. 2023

독서의 해악(?)에 대하여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고

올해 첫 서평단 활동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고 리뷰를 썼다. 읽기 까다로웠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보다 훨씬 접근하기 편한 글이었다. 연초에 '행복론'과 '인생론'을 읽는 것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책읽기=힐링


쇼펜하우어가 열변하는 행복의 정의나 삶의 의미 등에 동의하며 읽다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카프카)'가 내 뒤통수를 내리친 부분은 독서와 문체에 관한 부분이었다. 충격을 넘어 지진과 같은 세계의 변혁이 도래했다.


나는 항상 책을 가지고 다닌다. 가방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출근하는 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가족여행을 떠나는 길 면접 보러 가는 길 어떤 길이든, 책 한 줄 읽을 수 없는 길이 확실해도 어김없이 챙겼다.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했다. 읽지 않은 하루는 정말 망했다며 한탄하고 절망했다. 내가 보낸 시간의 가치는 그날 읽은 책으로 환산되었다. 오늘 나는 내게 맞는 책을 읽었으니 가치 있는 하루였어, 어제 읽은 책은 엉망진창이라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


쇼펜하우어의 책은 연초 첫 달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마주했다.


독서란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학생이 글쓰기를 배울 때 선생이 연필로 그어 놓은 선을 따라 펜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것에 따라 책을 읽으면 우리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독자적 사고를 하다가 독서를 하면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타인의 생각이 뛰어노는 놀이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거의 종일 책을 읽되 그 사이에 멍하니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는 자는 독자적 사고를 할 능력을 점차 상실한다. 그것은 마치 늘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결국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389쪽


300년 전 쓰인 이 문단을 지금 번역한다면 '독서'를 '스마트폰'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가 통한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 손에 든 스마트폰, 뇌를 멈추게 만드는 각종 영상들, 그마저도 길이가 짧아지면서 뇌를 팝콘처럼 튀겨버리는 것들.


여행짐 1순위 책


최근 나의 독서 역시 이와 비슷했다. 내 생각을 펼쳐 글을 쓰는 일이 버거워 스마트폰을 집어 들다가 죄책감이 들어 책을 잡고 읽었다. 다 읽으면 다음 책을 읽었다. 읽은 책에 대한 감상도 피드백도 어떤 것도 없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은 것뿐이니까, 하루를 망쳤다는 죄악감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책을 읽을수록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말-현대는 차-을 타고 다니다 걷는 법을 잊어 약해진 하체 근육과 같이 생각하는 근육이 퇴화되었다. 일기도 간신히 썼다. 소설은 몇 달째 완성되지 못하고 있었다. 쓰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재능을 의심했다.


책이 나의 도피처였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황량한 낙원.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기본 사상에만 진리와 생명이 깃든다. 우리가 제대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독서로 얻은 남의 생각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이나 남이 입다가 버린 옷에 불과하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과 책에서 읽은 남의 생각의 관계는 마치 봄에 꽃이 피어나는 식물과 돌멩이 속에 든 태곳적 식물의 화석의 관계와 같다.

-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339쪽


올해부터 다 읽은 책을 헤아리고 권수를 계산해 목록을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읽은 책을 숫자로 환원하면 완독에만 목을 매고 책으로부터 얻은 것을 되새기는 활동을 외면하기 때문이다. 남이 입다가 버린 옷을 주워다 내 옷처럼 걸치는 건 문제다. 내가 할 일은 그 옷의 바느질이 어떤지,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디자인했는지 세밀하게 살피고 내 옷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쇼펜하우어가 남긴 화석을 손에 쥐고 꼼꼼히 살피며 어떤 식물을 키워낼지 고민하는 것처럼.


완독해야만 감상문을 쓰는 습관 역시 바꿔 보기로 한다. 책을 읽다 떠오르는 '내' 생각을 붙잡아 한 편의 글로 완성하는 작업에 익숙해질 것. 가끔 책 없이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것...은 필요하지만, 책은 가져가고 읽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내게는 중증의 책 분리불안증이 있답니다.....나는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화석을 만지작대며 행복해하는 고생물학자입니다....괜찮겠죠, 쇼펜하우어 선생님?


내 글을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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