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이 방정이다. 작년과 다르게 면역력이 갖춰졌는지 아이가 비교적 건강하다는, 육아 세계에서 금기시되는 말을 방심하고 내뱉고 말았다. 아파트 단지 내 물놀이터에서 수심 20m의 물속으로 거침없이 다이빙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아이의 성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방정을 기다렸다는 듯 아이는 다음 날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편도염이었다.
올해 여름 편도염이 아이의 발열 최대 일수를 기록하지 않을까, 일요일부터 시작된 열은 목요일 밤이 되어서야 간신히 잦아들었다. 해열제를 먹고 땀에 젖은 이마에 안심하고 깜박 잠든 사이 체온계는 40도를 찍었다. 해열제 교차복용을 하는데 아이의 몸속 열은 덱시부펜 계열만 찰떡같이 듣고 아세트아미노펜엔 꿈쩍하지 않는다. 열나요 어플 계산 없이도 열 체크 시간을 계산할 줄 알게 되었다. 38도 아래로 잘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방심한 틈을 타 빠르게 40도 가까이 올라갔다. 역대급 열이다.
밤샘 열체크를 위한 준비를 한다. 바람이 잘 통하는 거실에 아이를 재우고 식탁에 앉는다. 발열 전 덜컥 서평 제안을 수락한 책이 막 도착했다. 제목이 [지식의 기초]이고 '수와 인류의 3000년 과학철학사'라는 무시무시한 부제가 붙어 있다. 수...과학....수학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기를 쓰고 논술로 대학을 가버린 전형적인 수포자가 왜 이런 책을 읽고 글을 쓰겠다고 했을까,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겠다는 도전정신?
열을 잰다. 38.1도, 아이는 새근새근 깊이 잠들었다. 책을 편다. 무서운 제목 뒤로 보르헤스부터 시작되는 무난한 출발. 보르헤스의 <푸른 호랑이>라는 단편으로 책은 동일성과 차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동일성, 불변의 진리, 이성, 굳건한 틀, 지식의 탐구에 있어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는 관점. 차이, 변화, 비이성, 모든 것은 변한다고, 지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관점. 3000년의 인류 역사에서 지식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은 동일성이냐 차이냐로 분열되고 싸워 왔다.
한 시간 뒤 38.5도, 다음 체크에서 39도가 넘으면 해열제를 먹여야겠다. 37.5도 이상이면 미열, 38도 이상 열, 39도 고열, 40도 이상 당장 응급실에 갈 것, 숫자는 아이의 몸 상태를 단계별로 안내하고 부모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숫자는 명쾌하다. 2에 2를 더하면 반드시 4가 나온다고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다. 숫자는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다. 수많은 철학자들, 수학자, 신학자, 학자들은 수에서 동일성의 세계를 찾았다. 2+2가 4인 것처럼, 지식에서 불변하는 진리는 분명 존재하리라는 믿음으로 학문을 연구했다.
약을 먹인 만큼 정확히 효과를 발휘해 깨끗이 병이 낫는 세계는 명쾌하다. 아예 병이 나지 않는 세계는 완벽하다. 손 잘 씻고 사람 많은 곳을 조심하며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바이러스와 세균 따위가 접근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주는 안정감. 2(아이)에 2(연령대에 맞는 육아법)를 더하면 반드시 4(정상적인 발달)가 나온다는 법칙 아래 살아가는 건 얼마나 좋을까?
결국 39도를 넘어가 버리고 잠든 아이를 깨워 해열제를 먹인다. 유독 이번 편도염에서 아이는 그전까지 잘 먹던 약을 필사적으로 거부한다. 약 먹기 싫어 악을 쓰다 코피까지 난다. 왜 약을 거부하는지 알 수 없다. 왜 계속 해열제를 먹이는데 열이 빨리 안 잡히는지 알 수 없다. 2에 2를 더한다고 꼭 4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난하게 아이를 돌보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는 늘 우리의 예측을 벗어난다.
육아의 결과값은 1이 될 때도 있고 6, 10, 마이너스를 찍기도 한다. 만 3세가 되도록 무발화 상태인 아이 앞에서 절망하다가 수영장에서 너무 즐거워 내 눈을 보고 깔깔대며 웃는 아이와 눈이 마주쳐 한없이 행복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한다. 육아는 명쾌하지 않다. 일정한 규칙은 존재한다. 책은 우리에게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껴안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육아의 규칙을 준수하되 내 아이의 특수성을 감안하고 유연하게 행동하기. 열이 나면 병원에 데려가고 해열제를 먹이며 언어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서 몸으로 놀아주기, 쉽게 절망하지 않고 대책 없이 모든 걸 포기하지 않기. 꾸준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열은 반드시 내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