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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an 26. 2023

일단 육아, 일단 소설, 일단 삶

소설은 다양한 장소에서 시작된다. 방금 읽은 문장 한 줄, 도무지 잊히지 않는 너의 말, 선명한 새벽녘의 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로부터 한 인물이 태어난다. 주인공이 정해지면 질문이 시작된다. 너는 어떤 사람이니, 무슨 일을 했니, 왜 그런 선택을 했니? 가장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 이유를 묻는 왜? 왜 그런 행동을 했어? 왜 그래야 했어? 육아에서도 이 어려운 질문은 반복된다. 왜 우는 거야? 왜 화를 내는 거야? 왜 안 먹는 거야?


이 글은 어제 잘만 먹던 소고기를 먹다 뱉는 아이의 단호한 표정에서 시작되었다. 왜 밥을 거부하는 거야? 아이는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우리는 비언어-반언어적 표현을 단서로 삼아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쓴다. 고기가 질겨서, 밥이 식어서, 배가 안 고파서,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높은곳을 좋아하시는 ㅋㅋ


육아 초기 우울증이 왔을 때, 나는 내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를 탐색하여 목록으로 만들었다. 우리 선택으로 낳은 아이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부모의 의무니까, 사회의 일원으로서 구성원의 확장과 돌봄에 힘써야 하니까, 다들 이렇게 사니까...'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는 '왜?'를 탐색하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나는 왜 아이를 키우고 소설을 쓰는가? 그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한동안 육아일기를 쓰지 않았던 건 저 왜? 의 답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니까 아이를 키운다?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싫다. 이 세상에서 나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나만의 특별한 감정이지 사회의 주입식 관념의 결과물이 아니다.


아이를 낳겠다는 내 선택에 책임이 있으니까? 우리의 선택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맞지만 그건 '왜?'의 답이 될 순 없다. 우리는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낳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우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을 뿐이다.


방금 태어난 소설 속 주인공에게 질문했다.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니?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이유는 없어요.

행동에 근거가 없어도 될까?

사는 데 왜 사는지 생각하고 살면 복잡해서 살 수가 없잖아요. 일단 살아야지.


질문이 어려우면 시야를 바꾸어 보기


삶의 이유를 탐색하게 되면 다다르게 되는 곳은 낭떠러지, 죽음이다. 사는 일에 합당하고 정당한 이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근거가 없으니 포기하겠다는 절망 대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지는 '일단'이다. 태어난 이상 이 삶을 일단 살아간다. 태어나게 했으니 이 생명을 일단 키운다.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올랐으니 이 주인공을 일단 완성한다.


제목이 틀렸다. 육아도 소설도 둘 다 쉽지 않다. 일단 쓴다. 어제 소고기를 거부했으니 오늘 새 메뉴를 일단 만들어 본다. 아직 말이 트이지 않았으니 일단 언어치료 센터를 등록한다. 소설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결말까지 일단 쓴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다짐해 놓고 새해 들어 한 편도 브런치 글을 쓰지 않았으니 뭐라도 일단 쓴다. 이 글은 '일단'의 자세로 무작정 쓰다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이 글을 완성하고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목 오른쪽이 빨갛게 부어 멍울이 져 있었고 임파선염 의심 소견으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왜 밥을 안 먹는지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ㅠㅠ 특히 건강과 관련해선 원인을 발견하는 과정은 절대 놓칠 수 없다..


일단 회복하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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