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다양한 장소에서 시작된다. 방금 읽은 문장 한 줄, 도무지 잊히지 않는 너의 말, 선명한 새벽녘의 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그림자로부터 한 인물이 태어난다. 주인공이 정해지면 질문이 시작된다. 너는 어떤 사람이니, 무슨 일을 했니, 왜 그런 선택을 했니? 가장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이 이유를 묻는 왜? 왜 그런 행동을 했어? 왜 그래야 했어? 육아에서도 이 어려운 질문은 반복된다. 왜 우는 거야? 왜 화를 내는 거야? 왜 안 먹는 거야?
이 글은 어제 잘만 먹던 소고기를 먹다 뱉는 아이의 단호한 표정에서 시작되었다. 왜 밥을 거부하는 거야? 아이는 아직 말문이 트이지 않았고 우리는 비언어-반언어적 표현을 단서로 삼아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쓴다. 고기가 질겨서, 밥이 식어서, 배가 안 고파서, 먹을 기분이 아니어서, 그냥.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육아 초기 우울증이 왔을 때, 나는 내가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를 탐색하여 목록으로 만들었다. 우리 선택으로 낳은 아이니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건 부모의 의무니까, 사회의 일원으로서 구성원의 확장과 돌봄에 힘써야 하니까, 다들 이렇게 사니까...'육아보다 쉬운 소설 쓰기'는 '왜?'를 탐색하는 개인적인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나는 왜 아이를 키우고 소설을 쓰는가? 그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한동안 육아일기를 쓰지 않았던 건 저 왜? 의 답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엄마니까 아이를 키운다?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싫다. 이 세상에서 나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의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내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나만의 특별한 감정이지 사회의 주입식 관념의 결과물이 아니다.
아이를 낳겠다는 내 선택에 책임이 있으니까? 우리의 선택에 최선을 다한다는 건 맞지만 그건 '왜?'의 답이 될 순 없다. 우리는 아이를 왜 낳아야 하는지 생각하고 낳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우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을 뿐이다.
방금 태어난 소설 속 주인공에게 질문했다.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니?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이유는 없어요.
행동에 근거가 없어도 될까?
사는 데 왜 사는지 생각하고 살면 복잡해서 살 수가 없잖아요. 일단 살아야지.
삶의 이유를 탐색하게 되면 다다르게 되는 곳은 낭떠러지, 죽음이다. 사는 일에 합당하고 정당한 이유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근거가 없으니 포기하겠다는 절망 대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지는 '일단'이다. 태어난 이상 이 삶을 일단 살아간다. 태어나게 했으니 이 생명을 일단 키운다. 소설의 첫 문장이 떠올랐으니 이 주인공을 일단 완성한다.
제목이 틀렸다. 육아도 소설도 둘 다 쉽지 않다. 일단 쓴다. 어제 소고기를 거부했으니 오늘 새 메뉴를 일단 만들어 본다. 아직 말이 트이지 않았으니 일단 언어치료 센터를 등록한다. 소설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결말까지 일단 쓴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쓰기로 다짐해 놓고 새해 들어 한 편도 브런치 글을 쓰지 않았으니 뭐라도 일단 쓴다. 이 글은 '일단'의 자세로 무작정 쓰다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이 글을 완성하고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목 오른쪽이 빨갛게 부어 멍울이 져 있었고 임파선염 의심 소견으로 항생제를 처방받았다. 왜 밥을 안 먹는지에 대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ㅠㅠ 특히 건강과 관련해선 원인을 발견하는 과정은 절대 놓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