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기억이 두 눈과 눈을 문지르던 손가락과 손가락에 맺힌 눈물로 기록된 날. 결과를 기다리던 공모전과 투고, 창작지원금 선정 명단 그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공백, 빈자리,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백지다, 아무도 읽지 않는 텅 빈 페이지.
빈 페이지는 흰 벽과 같고 흰 벽은 절망이며 절망은 통곡이다.
벽에 투명한 잉크로 쓰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너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너의 시간은 무의미했다.
존재는 현재시제고 시간은 과거 시제로 쓴다. 습관적으로, 시간은 내 뒤에 존재는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존재와 시간은 같은 의미다.
시간이 있어야 존재가 있다.
그러므로 내가 노력한 1년 간의 시간이 부정당한 순간, 나의 존재 역시 동시에 부정당했다.
1년 전의 나는 하루 종일 울었다. 당황한 남편과 어리둥절한 아이가 나를 보았다. 우는 나를.
둘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내 존재를 입증하는 일에.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일자리를 구했다. 일정한 출퇴근 시간이 존재하며 매달 월급이 지급되는 일을 구했다. 3월에 첫 월급을 받고 오래 묵은 장바구니를 싹 비웠다. 책, 가방, 옷, 신발, 새 스마트폰, 간식, 남은 돈은 적금을 부었다. 적금 이름을 창작지원금이라 붙였다.
내가 나의 시간을 돈으로 환전한 결과물.
육아와 근무의 병행은 하루의 시간을 온전히 요구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정도의 크기로 한 가닥이라도 주우면 그날은 여유로운 날이다. 읽지 못한 책과 쓰지 못한 노트가 쌓인 책상을 보며 슬퍼지면 '창작지원금'을 확인했다. 내가 나의 시간에게 지불한 액수를 헤아렸다. 이 시간은 미래의 글이 되겠지, 하면 안정된 기분으로 아이 반찬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나는 미래의 나에게 줄 시간을 저축하고 있다.
지금 나는 아이와 남편과 나 자신을 책임지고 있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훌륭하다. 인간이 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감정이다.
타인에게 무책임한 세계는 절망이다.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사람은 무참하다.
나는 나를 책임지고 있다.
나는 너를 책임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육아와 가사에 쓸 절대적인 시간이 줄어들었음에도, 오히려 순간 집중도가 예리해졌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재해석하며 삶이 재구성되었다.
육아가 어렵고 힘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육아의 어려움이란 '시간의 증여'라는 행위다. 내 시간을 타인에게 증여하는 행위가 불러일으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다. 시간이란 가능성이고, 공부나 일이나 운동, 기타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간을 아이라는 타자에게 쓴다. 구체적인 보답이나 보상의 기대 없이, 모성애라는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인 감정에 기대어 나의 시간을 지불한다.
육아를 포함한 돌봄 노동의 힘겨움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의 증여, 나의 시간을 네게 줄게, 조건도 대가도 없이.
작년의 나는 모성애라는 단어를 증오했다. 내 시간을 빼앗겼다고 생각했고 분노에 서슴없었다. 내 사간을 네가 다 가져가 버렸는데,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겠니? 내 시간을 지불한 대가는 누가 치러줄 거니? 분노에 찬 외침에 세계는 되려 더 큰소리로 나를 책망했다. 엄마라는 존재는 대가를 바라지 않아, 모성애는 훌륭한 감정이고 너는 그걸 귀하게 모실 줄 알아야 해, 어디 감히 큰소리를 쳐?
시간이 있어야 존재가 있다.
누구도 엄마의 시간을 책임지지 않고, 아무도 내 존재를 책임지지 않았다.
일 년 뒤, 나는 나를 책임지기로 결정했다. 하루의 절반은 아이에게, 남은 절반은 계좌에 쌓아놓는다. 구체적인 숫자로 기록한다. 나는 나를 책임지며 너를 책임지고 있어.
책임이라는 단어가 시간을 앞으로, 미래로 위치시킨다.
시간이 앞서 가며 앞을 밝히자 아이의 웃는 얼굴이 보이고 따라서 웃는 내 얼굴이 보인다.
이 선택이 완벽한 답은 아니지만, 부분점수라도 받기 위해 뭐라도 쓴다. 일을 하며, 너를 책임진다. 나 역시 책임지기 위해서.
내 시간을 기꺼이 네게 줄게.
진심으로, 책임이란 단어가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