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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Sep 13. 2022

권토끼는 자유를 꿈꾸는가

아기와 애착 인형

토끼는 토끼다. 자신의 첫 주인의 성이 권 씨니 권토끼. 권토끼는 큰 주인, 그러니까 제 주인의 부모가 임시로 붙인 이름임을 안다. 토끼는 아직 제 주인, 그러니까 작은 주인의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직접 듣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토끼의 귀나 팔을 잡고 땅에 질질 끌며 가거나, 두 손으로 토끼의 얼굴을 받쳐 들고 코에 제 코를 가져다 대며 웃을 뿐이다.


토끼보다도 작았던 작은주인과 함께


권토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기다린다.

인형의 본질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인형의 운명이라고 토끼에게 누가 알려주었나, 권토끼는 생각했다. 자신은 털 모양의 천과 천을 잇는 실과 속을 채운 솜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안다. 안다고 생각하는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처음엔 부드러웠으나 점점 까칠해지는 천 속에? 하나 둘 느슨해지는 가느다란 실 안에? 몸속에서 뭉덩뭉덩한 솜이 인형의 존재를 증명하는 핵심인가?


권토끼는 자신의 오른 다리가 떨어져 나갔을    안쪽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너덜너덜한 실밥과 안에서 밀려 나온 솜들은 보기 흉했다. 인형의 본질은 실과 솜이고 권토끼는 실과 솜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싫었다.


작은 주인은 그런 토끼의 속도 모르고 다리를 꿰매는 큰 주인 앞에서 어서 인형을 달라 떼를 썼다.


주인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모른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인을 떠나자.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주인으로부터 벗어나자.


주인덕에 비행기도타고 출세했다야


집을 떠나 인간과 물건으로 가득한 커다란 공간에서 권토끼는 처음으로 탈출을 향한 열망을 자각했다. 큰 주인들은 산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작은 주인은 토끼를 무릎 위에 눕힌 채 뒤로 누워 천장의 불빛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인들의 산만해진 주의력을 틈타 권토끼는 몸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인 머리를 바닥으로 축 늘어뜨렸다. 중력이 토끼의 탈출극에 공모했다. 바닥으로 떨어져 작은 주인이 탑승한 유모차로부터 도망치는 건 놀랄 만큼 쉬웠다.


더 놀랄 일은 큰 주인들이 탈출한 권토끼를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넓고, 크고, 깊고, 인간과 물건이 많고, 빛과 소리로 가득한 쇼핑몰에서 주인들은 권토끼를 찾았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토끼 인형을 과일 매대 기둥 앞에 기대어 앉혀 놓은 것을 큰 주인 중 한 명이 발견했고 권토끼는 무력하게 작은 주인의 품에 안겼고 탈출을 꾀한 벌로 집으로 돌아가 세탁기에 갇히기까지 했다.  


권토끼는 포기하지 않았다. 작은 주인의 작은 오른쪽 눈을 짼 날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하늘이 새파란 날 큰 주인과 작은 주인이 소풍을 나온 공원에서, 작은 주인이 잠들고 큰 주인들은 책을 보는 카페에서 권토끼는 머리-중력 탈출법을 시도했고 매번 붙잡혔다. 병원 주차장은 큰 주인이 한 명뿐이었고 작은 주인이 깊게 잠이 들어 탈출 성공 확률이 매우 높았지만 권토끼의 운명은 작은 주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낯선 경험에 마주할 땐 토끼 코를 만지작


작은 주인은 토끼의 마음을 알까.     


탈출한 벌로 세탁기에서 실컷 구르고 나온 권토끼는 두 번째 벌로 빨래집게에 두 손을 찝힌 채 기둥에 걸렸다. 토끼의 몸이 마르는 동안 작은 주인은 간절한 눈빛으로 토끼 인형을 올려다보았다. 큰 주인의 손을 잡아끌고 권토끼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울었다. 토끼 인형 없이 아기 침대로 끌려간 작은 주인은 큰 소리로 울었다. 드라이기 바람을 맞은 권토끼가 돌아오고서야 작은 주인은 웃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토끼의 얼굴에 비볐다.


큰 주인의 말에 따르면, 작은 주인이 아낌없이 뽀뽀를 퍼주는 존재는 권토끼 하나뿐이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작은 주인은 토끼를 안다.

작은 주인은 토끼가 자신의 유일하고 고고한 단짝임을 안다.

단짝은 찰싹 붙어 단짝이고, 그곳이 어디든 공원이든 카페든 식당이든 길 위든 물 속이든, 유모차에서 자동차에서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놀 때도 과자 먹을 때도 만화 볼 때도 뛰어놀 때도 잘 때도 자신을 떼놓지 않음을 안다.

부드러웠던 토끼의 코가 까칠해지도록 만지고 쓰다듬고 입으로 물고 빨고 부비댄 애정표현을 서로 안다.

 몸보다도 작았던 작은 주인의 곁에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토끼는 알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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