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wooRan Jul 16. 2022

부모가 가장 바라는 소원

30개월 아이의 급성 폐렴 입원기

병원 침대 바닥에 보호자 이불을 깔고 누워 읽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우리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대의 안위를 위하여 이 충고에 귀 기울일지어다.
기쁜 날에는 이것을 명심하라,
예기치 못한 슬픔이나 해악이 뒤따라온다는 것을.

- 제프리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1권 233-234쪽


15세기에 쓰인 문장은 21세기의 인간에게도 효력을 발휘하는데, 평소 내 인생관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저울은 기쁨과 슬픔으로 나뉘어 대칭을 유지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기쁜 소식은 슬픈 소식과 단짝이고 합격이나 성공 등의 좋은 일은 새로운 문제 상황과 고민거리의 안 좋은 부분들도 함께 가지고 온다.


30개월 인생 두 번째 입원 ㅠㅠ


아이의 심장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소리는 나를 기쁘게 했고 이 소리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로 나를 고뇌에 빠뜨렸다. 생명은 탄생의 기쁨과 죽음의 슬픔을 동시에 가진다. 존재는 지속적인 고통이다. 숨 쉬는 것 자체가 힘겨운 신생아를 보면서 외람되게도 나는 존재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습관적인 우울의 일종인가, 혹은 직업병인가?(ㅋ...)


2년 만에 채용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나는 기뻤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적응했고 나는 부지런히 일하며 육아와 다음 작업에 쓸 돈을 모으면 된다 자신했다. 3월 개학을 앞두고 가족 전체가 코로나 확진자가 되었다. 4월 지지부진한 아이의 오른쪽 눈 아래 다래끼를 제거하기 위해 수면마취 수술을 감행했다. 5월부터 시작된 콧물이 멈추지 않더니 6월 중이염으로 발전했다. 한 달 넘게 항생제를 복용하자 장이 약해져 장염이 왔다. 유행하는 병이란 병은 다 수집하는 질병계의 트렌드세터인 연말 생의 내 아이는 밥 거부까지 놓치지 않았다.


아이는 자주 아프다. 아프면 열이 난다. 열이 나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다. 아이를 볼 수 있는 건 나와 남편뿐이다. 아침 출근 준비를 하다 심상찮은 아이의 상태를 발견하면 열을 재고 열이 나면 내가 오전 지각을 쓰고 남편이 먼저 출근한 뒤 오후 조퇴로 교대했다. 병이 길어지면 하루씩 번갈아가며 가족돌봄휴가를 썼다.  보강과 수업 교환과 원격업무시스템으로 수업을 하고 시험문제를 내고 업무를 쳐냈다. 버티고 버텨 여름방학을 앞둔 7월 얼추 마무리된 일과 계약 연장 소식과 하반기 예정된 이사 등으로 우리는 들떠 있었다.


생명수 뽀-쥬



주말부터 시작된 기침으로 월요일 소아과에 다녀와 기침감기 약을 받았고 그날 저녁 치킨을 시켜 다 같이 나눠먹었다. 아이는 후라이드 치킨을 정말 좋아하고 아주 잘 먹었다. 밤부터 숨소리가 이상했다. 물 밖의 물고기처럼 가쁜 숨이 색색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나왔고 열이 해열제를 써도 38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오후 출근을 알리고 인근 소아과 전문+입원 가능한 큰 소아과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달려갔다. 바이러스 검사와 피검사, 폐 엑스레이를 찍었다. 결과는 보카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급성 폐렴. 폐 안에 가래가 차고 염증 수치도 높았다. 증상이 심각해 바로 입원이 결정되었다.


화요일 오전 입원한 아이는 토요일 오전 퇴원할 수 있었다. 매일 3회 투약과 호흡기 치료, 항생제 주사, 어딜 가든 링거액 병을 달고 다녔다. 열은 입원 후 하루 만에 떨어졌고 기침이 서서히 줄고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던 아이의 식욕도 차차 돌아왔다. 재작년 5월 신우신염으로 인한 입원과 비교해 간병인 교대가 가능한 상황이 감사했다. 남편과 번갈아 가족돌봄휴가를 쓰고 저녁마다 교대했다. 호흡기 치료가 너무 싫어 발버둥 치는 아이를 결박시켜 네뷸라이저를 작동시키면 다 끝난 뒤 아이도 나도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지루한 입원 생활에 울음으로 불만을 토로하다 잠든 아이 옆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두드렸다. 공모전 마감까지 이 주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아이의 심장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생각했다. 심장이 뛰는 걸 확인한 순간 이 강낭콩은 인간으로 태어날 것이고, 인간은 병에 걸리고, 아플 수밖에 없으니, 나의 아이가 아플 수 있고 그 아픔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아이는 아프면서 큰다'는 말은 육아의 관용구가 되었다. 나 역시 이 말을 쓴다. 하지만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염증과 가래로 꽉 찬 폐를 쥐어짜며 우는 아이를 밤새 달랜 뒤 침대 옆에 주저앉아 있으면, 저 관용구를 중얼거리는 나의 이성을 향해 감성이 커다란 방망이를 들고 달려가 사정없이 줘패게 된다. '내 아이는 안 아프고 컸으면 좋겠다고, 잘난 척 그딴 말 한 번만 더 씨부려 봐라!'



기쁨 뒤에 슬픔이 온다는 걸 알지만, 아이에겐 오직 기쁨만 있길 바란다.

아픔 뒤엔 회복이 온다는 걸 알지만, 아이에겐 오직 건강만 있길 바란다.

아프니까 인간이다, 같은 말은 내 소설에나 실컷 쓸 테니 내 아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부모의 당연한 소원이다. 이제 나는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앞에서 손을 포개고 '작가가 되게 해 주세요.'를 빌지 않는다. 작가는 이미 하고 있다. '아이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세요.'를 숨보다 빠르게 내뱉는다. 아이의 기쁨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은 다 내가 지고 갈 테니까, 너는 오직 기쁨이기만 해 다오.


그리하여 회복된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 신나게 웃고 있다는 결말로 슬픔의 투병기는 여기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라는 미래를 믿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