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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Jun 13. 2022

아이라는 미래를 믿는 마음

이진민 [아이라는 숲]을 읽고

5   브런치는커녕 일기도 거의 쓰지 못했다. 쓰지 않았다. 매일 주어지는 일과, 나아질 기미가 없는 아이의 코감기, 답이 없어 보이는 밥 거부, 언어 문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내 아이의 콧구멍 마를  없이 흐르던 콧물은 중이염이 되었다. 유일하게 입에 넣는  성공한 기름에 튀기듯 구워내는 소고기밥볼을 매일 아침 만들어 도시락을 싼다. 말문이 트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육아의 길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발을 걸고 시야를 가로막는 나무들이 지나치게 많다. 길을 잃었다. 말도 못 하는 29개월짜리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계약직 일을 하러 가는 아침마다 가슴팍에 나무뿌리가 뒤엉킨 느낌이었다. 글을 쓰지 않고 책을 읽지 않았다.


거의   만에 책을 펴 든  표지의 '숲을 곁에 두고 나무만 바라보는 부모를 위한'이라는 문구 때문이기도 했다. 바쁜 일이 거의 마무리된 시기이기도 했다. 아들이 옆에서 표지와 같은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를 보지 못하고 아이의 문제에만 집중하다 아이를 놓치고 있지 않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맞은편에 앉는다, 자기 책 들고 ㅋ


이진민 작가님의 첫 책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를 처음 읽었을 때부터 직감했다. 나의 육아 멘토가 내 서재를 제대로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육아라는 형이하학적 행위에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적 해설을 달아주는 친절한 목소리는 귀하다. 대부분의 육아서는 정답을 알려 주려 하지, '육아란 무엇인가?'따위의 질문을 제시하는 방법은 외면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생각하는 갈대요, 인간의 모든 행동엔 생각이 깃들어야 하고, 육아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38쪽, 다치는 걸 너무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 아이들이, 다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시속 1미터의 속도로든 네발로 기어서든 그리로 가봤으면 좋겠다. 간디는 실수할 자유가 없는 자유란 가치가 없다고 했다. 자유라는 건 원래 그렇게 실수의 공간을 넉넉히 품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니 자유롭게 다쳐보고 실수해보고 하나씩 배워서 일어났으면 좋겠다. 안 되는 게 되는 거라고 믿는 낙천적인 마음이 단단하게 뿌리내리면 좋겠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뮈엘 베케트는 이렇게 말했다. "또 실패했다. 이번에는 좀 더 세련되게." 오늘도 망했지만 좀 더 멋지게 망했다는 사실에 뿌듯할 수 있다면 꽤 성공한 인생 아닐까. 실패란 내가 뭔가를 했다는 흔적이다. 그러므로 멋지게 망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멋진 셈이다.


너의 육아가 실패한 건 아닌지 매섭게 두려워하는 자여, 이리로 오라. 꼭 필요한 시기에 정확하게 도착한 책의 메시지는 나의 현재 상태를 빠르게 파악한 후 선물을 건넸다. 눈앞의 나무 너머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안경을. 이 책은 안경이다. 현재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한 이들의 시선을 틔어주는 안경, 시선을 바꾸는 것이 바로 철학이 아닌가.


[아이라는 ] 내용은 사실 이제  30개월이  아이에게 적용하기엔 조금 이르다. 공부에 대해, 인성 교육과 경제 교육에 대해, 아이의 사회생활과 언어생활에 대한 통찰과 실현은 일단 아이와의 의사소통이 전제되고 먼저 말문이 트여야 한다. 엄마 아빠도 정확히 발화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인성 교육의 방법에 대한 조언이  무슨 소용인가?


길을 찾아서~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이성적인 사고가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다 신통방통한 숙취해소제를 한 병 들이마신 느낌과 같았다. (좋은 책에 숙취해소제 비유라니 정말 죄송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미래의 아이에게 용돈을 주고 경제관념을 가르치고 있다. 남편과 상의 하에 기본적인 성교육을 시작하고 있다. 친구의 의미를 공유하고 한 발 뒤에서 아이의 사회생활을 지켜본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와 아이가 함께 보낼 훨씬 긴 시간을 꿈꾸고 있었다.


이것이 아이라는 숲이구나, 당장의 나무를 쳐내는데 급급할 게 아닌 오랜 기간 부지런히 가꾸어야 할 거대한 숲. 숲이 보이기 시작하자 눈앞을 가리던 나뭇가지가 사라지고 뒤엉킨 나무뿌리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현재의 고통은 성장의 밑바탕이 될 것이고, 지금의 시간은 미래의 숲이 되리라 믿자. 큰 병 없이 건강히 어른이 되어 엄마가 해준 밥을 그리워하며 귀에서 피가 나도록(ㅋㅋ) 수다를 떨 아이의 미래를. 책을 읽으며 마주했던 미래의 숲은 너무나 아름다워 뭐라도 써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게 했다. 되찾은 흐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약간의 미소를 담아.


(이 책의 유머러스함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내 변변찮은 감상문이 몹시 부끄럽다...으헣헣)


-300쪽, 최근에 읽은 에릭 와이너의 인터뷰가 좋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둡고 어려운 면이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죠. 유머는 제게 그 어려움들을 버티게 해줍니다. 유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스스로를 비웃는laugh at yourself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문제, 그리고 삶의 모순에 대해 코웃음을 치며 웃어넘길 수 있다면 이 힘든 삶을 그럭저럭 힘겹지 않게 건너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남을 보고 웃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보고 웃는 것, 삶의 모순에 좌절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넘기는 것이 해학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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