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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Mar 06. 2024

아무도 내게 크로스핏을 시키지 않았는데

크로스핏 게임즈 오픈 24.1 와드 후기

나는 쇠맛이 무슨 맛인지 안다.


지금 내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맛, 비리고 거친 금속성의, 먹어선 안 될 것을 먹어버린 뒤 느껴지는 후회 같은 맛, 나는 쇠맛을 안다.


방금 2024년 크로스핏 오픈 1주차 와드를 끝마쳤고, 내 몸은 한여름 폭염에 녹아내린 아스팔트와 같은 상태가 되어 목구멍 속 쇠맛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 뇌는 내가 내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인 것에 화가 나서 파업을 선언했다. 크로스핏을 시작한 뒤로 뇌는 자주 화를 낸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 하루 대부분 누워서 숨만 쉬면서 편안하고 좋았잖아. 배신감을 느낀 느낀 나의 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와드가 끝난 뒤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운동=와드(Workout Of the Day)


전 세계 크로스피터들의 축제 오픈 첫주차 와드는 두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었다. 바닥 위 덤벨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덤벨 스내치dumbbell snatch,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는 버피burpee, 두 개만 하면 된다.


오픈 와드를 확인한 순간부터 쇠맛은 내 미각을 지배했다. 동작이 두 개 뿐이라는 건 갯수가 많다는 뜻이다. 덤벨 스내치 총합 90개, 버피 총합 90개, 총 180개를 15분 안에 해야 한다. 15분 동안 부처님 앞에서 108배를 올리는 수행자의 마음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고 엎드리고 일어나고, 자아란 곧 짐과 같고 이 짐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것이 곧 인생이라는 비유에 걸맞는 동작을 해내야 한다. 덤벨 스내치는 육아의 고됨을 형상화하기도 하는데, 현재 만 4살인 내 아들 몸무게가 16kg을 넘기 때문이다. 여자 RX`d 기준 35파운드 덤벨 무게가 15kg이다. 아들을 한 손으로 90번 들어올린다. 들어올렸다. 쇠맛 제대로 느낄 때까지.


아무도 내게 쇠맛을 권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180개의 고행을 견딜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크로스핏 오픈 와드를 하겠다고 참가비를 내고 신청한 사람은 나다.

내 손으로 직접 쇠를 들어 머리 위에 들어올리고 바닥에 내리쳤다.

금속성의 고통을 손수 내 입에 쑤셔넣었다.


숨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팔과 다리에 감각이 없다. 심장과 폐로부터 느껴지는 통증에 온 몸의 감각이 집중된다. 목구멍 아래로 가슴 전체가 수백 개의 바늘을 삼킨 것 같다. 몸 속 혈관에 흐르는 피가 철로 바뀐 것 같다. 피에 철분이 함유되어 있으니 쇠맛은 곧 피맛이다. 같이 오픈 와드를 수행한 회원 한 명이 나와 같은 자세로 바닥에 누워 기침하며 '피맛이 난다'는 말을 한다. 나도 기침을 한다.


나는 쇠맛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이곳 크로스핏 체육관에 있는 물건 대부분이 쇠로 되어 있다. 덤벨, 바벨, 케틀벨, 철봉. 특히 철봉은 학교 운동장에서 체력 테스트를 치르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남학생은 턱걸이, 여학생은 오래 매달리기로 체력을 확인했다. 나는 체육 선생님이 시작을 외치기도 전에 철봉 바닥에 깔린 모래더미를 뒹구는 '0초대' 학생이었다. 태양에 달궈진 녹슨 철봉의 쇠 냄새와 운동장 모래에서 피어오르는 금속의 냄새는 매달리기 하나 못 하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은 실제로 웃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체력이 저질이다, 저질.

나도 동의했다.

내 몸이 저질이다, 저질.

하늘보다 바닥에 훨씬 가까운 낮은 질의 몸을 질질 끌고 체력장을 끝낸 친구 옆에 앉는다. 그날 나는 한 개의 윗몸일으키기를 했고, 멀리라는 단어를 쓰기 민망한 멀리뛰기를 했고, 다른 학생보다 한 바퀴 더 달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전교생 중 가장 오래'달리기를 했다. 운동장의 모래먼지 역시 쇠 맛이 난다.


쇠맛 침을 뱉으며 나는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이 맛을 느낄 일은 없겠지.


그 학생은 무럭무럭 자라 돈을 내고 쇠 냄새를 맡는 것도 모자라 쇠를 씹어먹으러 오는 훌륭한 크로스핏터로 자랐다.


아무도 내게 크로스핏을 시키지 않았는데, 하게 되었다.


아무도 내게 크로스핏에 대한 글을 쓰라 시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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