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 폐가 찌그러진 것 같은 괴로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절박감, 몸 전체가 작은 폭탄으로 변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그 고통.
우리는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계단과 에스컬레이터가 나란히 설치된 곳이면 기꺼이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디딘다. 5층 이상 높이의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욕을 한다. 바퀴 달린 이동수단을 찾아 최대한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줄인다. 집으로 돌아오면 일단 눕는다.
여기, 오늘의 와드가 적힌 칠판 앞에 서서 한숨과 한탄을 나누는 이들이 있다.
- 오늘 와드 뭐예요? 와...대박.....
- 나는 미리 카페에서 보고 왔지. 미친다 미쳐.
- 로잉에 데드에 더블언더에 상하체 골고루 탈탈 털어버리겠다 이거 아냐?
- 나는 암렙AMRAP(as many rounds as possible)이 제일 싫어!
- 20분 겁나 안 가겠네, 내 미래가 딱 보이네.
- 와드 보자마자 숨이 차는데 정상인가요?
중간 추임새로 와! 맞아요! 싫어! 를 넣어주면 완성되는 이 대화는 매일 수많은 크로스핏 체육관에서 반복된다. 오늘 힘들겠다, 숨찬다, 진짜 하기 싫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박스의 메아리와 같다.
그리고 아무도 뒤돌아서 박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한숨을 쉬면서 로잉을 타고, 한탄과 함께 바벨에 플레이트를 끼우고, 줄넘기를 넘다 채찍처럼 후려 맞은 양팔을 내보이며 울상을 짓는다. 고통받는 나를 보아라!
20분 동안 로잉을 타고 데드리프트를 하고 줄넘기를 넘고 다시 로잉, 데드, 줄넘기, 로잉, 데드, 줄넘기, 정해진 20분이 될 때까지 운동은 끝나지 않는다. 땀이 쏟아져 비가 내린 듯 바닥에 점점이 흔적이 남는다. 숨이 차고 팔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덜덜 떨린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나의 로잉, 바닥에 붙어버린 것 같은 내 바벨, 발에 뿔이 달렸는지 자꾸만 걸리는 줄넘기,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약속된 20분이 끝나면 한마음 한뜻으로 바닥에 쓰러진다. 오늘도 열심히 고통받았다!
자발적으로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내 몸은 조금이나마 더 편한 쪽을 선택하길 바란다. 걷기보다 타기, 서 있기보다 앉기, 앉기보다 눕기. 제발 소파에 누워 있자는 몸의 간청을 외면하고 크로스핏 박스에 입장한 이들은 고통을 원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바란다. 어제보다 조금 더 무거운 무게를, 더 많은 개수를, 더 복잡한 동작을, 긴 운동시간을 갈구한다. 오늘 운동은 정말 힘들겠다 투덜거리며 와드를 수행한다. 오늘 나는 죽었다고 중얼거리며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수분을 펑펑 쏟아낸다. 와드가 끝나면 그토록 몸이 원했던 눕기를 한다. 눕게 되는 결과는 같다. 고통의 과정이 끼어들었을 뿐.
아무도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고통을 감내하고 괴로움을 버티는 연습은 필요하다.
우리의 몸이 가지고 있는 태초의 기억, 맹수에 쫓겨 땅 위로 전력질주하고 산을 타고 바위를 들어 올리고 살아남기 위해 몸을 써야 했던 경험을 되살리는 과정은 중요하다. 내 발로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들리지 않던 무게를 들어 올린 순간, 어제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틴 내 심장이 겪은 고통 속에 ‘살아 있다’는 감각이 숨어 있다.
고통을 원하지 않지만 삶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법칙은 굳건하고 우리는 이를 몸으로 체현한다.
스물다섯 가까이 자발적으로 운동과 먼 삶을 살았다. 내가 누운 곳이 방 전체인 고시원에 웅크려 몇 년을 공부만 했다. 재채기 한 번 했다고 허리가 나갔다. 하기 싫은 일을 미룬 대가로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게 나를 파괴했다. 살기 위해 운동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했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고통을 받아들였다.
오늘의 와드가 끝나고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며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것을 느낀다. 게을러지는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을 하고 혈관 속에 불꽃이 다시 타오르며 새 공기로 가득 찬 폐가 온몸에 산소를 공급하고 뇌가 옛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살아 있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