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노잼 시기를 탈출하는 방법
“크로스핏 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크로스핏 박스 지박령으로 지내다 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자주 받는다. 9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대답하면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감탄한다. 이렇게 힘든 운동을 그렇게나 오래 하시다니! 어쩐지 아까 와드 하실 때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내심 원하던 반응을 받은 뒤 나는 변명처럼 덧붙인다.
“중간에 좀 쉬었거든요, 3년 정도, 아이 낳고 키우느라...”
지난주에도 같은 질문에 똑같이 답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이상했다.
근데 왜 내가 변명을 하고 있지?
하나의 운동을 거진 십 년 가까이했으면 준 선수급 아니냐며, 200파운드는 가뿐히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철봉과 철봉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실력이어야지 않냐며, 30분이 넘는 와드를 하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야지 않냐며, 왜 십 년을 했는데 아직도 성공하지 못한 동작이 많고 1RM 무게는 미미하고 성장은 지지부진한가?
내가 나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나?
성공해야 한다는 표어는 밥 먹었냐, 잘 잤냐 급의 일상적인 문구가 되었다. 공부를 하면 당연히 일 등을 해야 하고 시험에 응시하면 합격해야 하고 글을 쓰면 책을 내야 하고 운동을 하면 그 분야의 대회에 출전해 입상할 실력이 되어야 하고,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된다. 그래서 노력한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노력하면 결과는 당연히 따라오겠지? 노력에 대한 보상은 응당 필연적이겠지?
한동안 크로스핏이 재미없게 느껴진 시기가 있었다. 운동하러 나가기 싫었다. 가도 와드만 한 뒤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해야 할 동작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나는 왜 크로스핏을 하는가? 재미있어서,라는 대답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정체기, 소위 ‘운동 노잼시기’에 발이 빠져버린 것이다.
운동이 의무가 되면 동작은 노동이 된다.
노동은 내 몸의 움직임에서 나를 소외시킨다. 팔다리의 움직임과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이마에 흐르는 땀이 의미를 잃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것은 무의미하다는 의식이 나를 지배한다. 노력 대비 내가 얻는 것이 없다는 절망이 나를 짓누른다.
내가 노력하면서 쏟아부은 시간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3년 간 공부한 시험에서 끝내 불합격하고, 몇 년째 글을 쓰고 출간하지 못하고, 운동 실력은 제자리걸음이고, 시간이 고이면 석유가 되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야지 썩은 채로 고여있기만 하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꼼짝할 수 없었다.
우울의 돌파구는 ‘일상의 습관’에 있었다.
내가 태어나서 30년 넘게 물을 마시면서 ‘물 마시기 기술에 통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습관대로 아침에 일어나 물을 마신다. 글씨를 쓰면서 글씨 쓰기 대회에서 입상해야겠으니 매일 연습하라고 나를 몰아세우지 않는다. 어제 쓰던 대로 오늘도 쓴다. 이를 닦고 이불을 개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챙겨 먹고 길을 걷고 인사하고 웃고 숨 쉬고 잠드는데 더 잘 성공해야겠다고, 37년 간 잠드는 일을 해 왔으니 완벽한 잠이라는 결과에 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는다.
습관은 일상적이고 일상은 나를 형성한다.
크로스핏은 나의 일상이다. 퇴근하고 저녁 챙겨 먹고 먹이고 남편에게 아이 잘 준비를 맡긴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박스에 가서 오늘의 와드를 확인하고 오늘 힘들겠다며 어제 근육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투덜거리고 와드를 하고 그래도 오늘 할만했다고 혹은 죽을 것 같다고 평가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드는 일상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의 와드를 해낸 것 자체가 성공이다. 크로스핏은 나의 일상이고 일상은 나의 삶이다.
크로스핏을 2015년부터 해 왔고요, 고인물은 틀림없고요, 아주 잘하는 편은 아니고요, 다만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하고 있고요, 목표는 환갑잔치 때 흰머리 휘날리며 와드 퍼포먼스 보여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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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초고는 12월 3일 저녁 7시쯤 완성되었다.
몇 시간 뒤 그토록 당연하던 일상이 산산조각 날 줄도 모르고, 분노에 찬 일주일과 활활 타오를 미래를 꿈에도 모르고, 나는 그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