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즌졍 Jan 19. 2020

1년간 이력서 안 쓰기로 결심한 이유

[Essay] 추파 던지는 월급에게 철벽 쳐보려고요.

이전 글에서 말했듯 나는 작년에 3개의 회사를 다녔고 전부 때려쳤다. 회사를 3개나 다닌 가장 큰 이유는 월급 없는 삶이 주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잠깐이라도 일을 쉬었을 때 들어오지 않는 급여는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졸업 직후 나의 목표는 하나였다.


3년 동안 1억을 모아서 해외에 나간다. 그러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연봉 많이 주는 회사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와중에 한국 대기업은 싫었다. 더 빨리 더 많은 문제를 더 정확하게 풀어내겠다며 매일 소금물의 농도를 계산하는 그들을 이겨내고 싶지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매일 소금물의 농도를 계산하는 그들을 이겨내고 싶지도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일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한 지 몇 주 되지도 않았는데, 커피 오백 잔 마신 듯 쿵쾅되는 심장과 앉아 있어도 스쿼트 하고 있는 듯 불안한 엉덩이에 매일같이 시달렸다. 그러다 대학시절 인턴으로서 같이 일했던 터키 디자이너 친구에게 2년 만에 연락이 왔다. 자기네 회사에 마케터가 필요한데 이력서 한번 보내보지 않겠냐고. 그때 당시 마케팅 인턴으로 일하기는 했으나 겨우 다섯 달 일했고, 이제 막 졸업한 내가 제대로 된 마케터 일리 없었다. 별생각 없이 이미 써놓은 이력서를 보냈고, 인터뷰를 봤고, 이러쿵저러쿵하다가 내일부터 일하라고 했다.

 

알바를 너무 많이 해서 그랬나 보다. 3개월 인턴으로 시작하라 했고, 알바한다는 생각으로 알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세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번번이 붙잡혔다. 나는 사회초년생이었다. 그렇게 일 년을 다녔다. 못 그만두는구나 싶어 진 순간 마음이 편해졌고, 그 이후로 나름 대충 재밌게 잘 다녔다. 3월 21일에 입사했고 3월 20일에 퇴사했다. 몇몇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 회사에서 가장 행복하게 회사 다니는 것 같은데 왜 그만두냐고. 시끄럽게 웃고 시도 때도 없이 덩실거린다고 일이 행복한 건 아닌데.


커피 오백 잔 마신 듯 쿵쾅되는 심장과 앉아 있어도 스쿼트 하고 있는 듯 불안한 엉덩이에 매일같이 시달렸다.


패션모델이 된 친구가 있다. 아니 사람이 있다. 나와 동갑이긴 하다. 20살 때 우연히 알게 되었고, 몇 달 종종 만난 적이 있다. 까닭을 알 수는 없으나 인스타 맞팔이었다. 모델이 되겠다 했었는데, 진짜 모델이 되었다. 광고가 아닌데도 이상하게 자꾸 내 인스타 피드에 패션쇼 사진이나 패션 광고 같은 게 올라왔다. 그 친구의 게시물이었다. 언팔했고, 언팔시켰다. 지인짜 못났다.


합정역 버스정거장에 그 친구가 등장했다. 그 뒤로 합정역을 갈 때마다 계속 계속 거기 있었다. 아씨 나는 도대체 합정역을 왜 그렇게 자주 간 건지.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했을지 상상됐다. 20살에 잠깐 보았을 때도 모델이 된다는 확신으로 워킹 배우고, 시장조사로 몇 시간씩 압구정을 걸어 다니고, 심지어 이미지 관리까지 했으니. 자꾸만 보이는 그 친구에 못난 짜증이 났다. 질투가 났다.


질투가 났다.


또 한 친구는 본인이 쓴 시로 신문사에서 문학상을 받았다. 분명 21살 때 만났을 때만 해도 중2병에 걸린 찌질이에 불과했는데. 이후 또 다른 문학상으로 상금 천만 원을 받았다는 소식은 지난한 회사생활로 겨우겨우 찍어놓은 신한은행 앱 속의 숫자를 비웃기까지 했다. 바보.


그래서 결심했다. 앞으로 일 년간은 절대 이력서를 쓰지 않겠다고. 술집이나 클럽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추파를 끈기 있게 던지는 월급에게 최선을 다해 만리장성급 철벽을 쳐보겠다고. 월급이 나에게 추파를 못 던지게 하려면? 낌새를 주면 안 된다. 흘리면 안된다는 거다. 너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시계를 보는 거야 같은 식의 눈길도 주면 안 된다. 그래서 이력서를 쓰지 않기로 결심한 거다.


사막에서도 수돗물 팡팡 써가며 설거지로 최저임금 받을 사람이 바로 나다.


어쨌거나 나는 잘 살아남을 거다. 어떻게든 잘 살 거고. 굶어 죽지 않을 거다. 사막에서도 수돗물 팡팡 써가며 설거지로 최저임금 받을 사람이 바로 나다. 남극에서 펭귄들에게 펭수 콘텐츠 팔아서 광고수익 얻을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오늘 죽어도 잘 죽을 수 있게, 내일 살아남아도 계속 살 수 있게, 그렇게 잘 먹고 잘 살 거다. 나는 나를 믿는다. 아멘.

작가의 이전글 주름도 없는데 나이가 보이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