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원한 감독님 이창동 2편
그의 존재는 항상 묵직한 공기가 흘렀고 깊은 눈빛에는 사물과 사람을 꿰뚫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소년 같은 웃음으로 눈을 반짝거릴 때엔 누구보다 순수함이 흘러넘쳤다. 특히 가늘고 긴 손가락은 비범한 예술가의 그것이었는데 나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그처럼 곱고 예쁜 손을 가진 남자를 본 적이 없었기에 매우 큰 인상으로 남아있다.
무엇보다 이창동 감독님은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그 어떤 이야기라도 누구나 귀 기울이게 할 만큼 그의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모두를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분 역시 '이야기를 할 때에' 가장 눈빛이 빛났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내게 그분은 '이야기를 해주려고'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 자신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창동만의 화법으로.
그것은 <오아시스>를 통해 모든 것을 벗어버린 '순수한 사랑의 힘'으로 더욱 깊이 말을 걸어왔고, <밀양>을 통해 고통이 지나간 자리 '계속되는 삶'을 성찰하게 하였으며, <시>를 통해 정점을 찍으며 관계와 삶을 '스스로의 구원'을 돌아보게 하였다.
개인적으로 <시>는 더 크게 인정받고 회자되었어야 할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감독 당신이 태어난 땅을 가지고 온 이야기. 그 땅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말한 이야기. '우리 모두가 가해자였던' 어떤 비극을 담아낸 이야기. 말하지 못한 슬픔이 담긴 이야기.
내가 사는 프랑스에서 이 영화와 관련된 아름다운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프랑스 친구의 어머니 그러니까 한 평범한 프랑스 할머니가 속해 계시는 모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모임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함께 '시를 읽는 모임'이었다. 어느 날 모임에서 영화에 나오는 시 '아녜스의 노래'를 불어로 번역하여 돌아가며 한 소절씩 읽었고 그다음 다 함께 영화 <시>를 보았다고 한다.
영화가 끝났을 때 그 자리에 계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수강생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한동안 아무도 일어나지 못하셨다고 말씀해주셨다. 그처럼 우리는 영화 <시>를 통해 마음 깊은 곳의 무언가를 만났고 그것이 우리를 감싸안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 오롯이 담긴 '이창동 액기스'는 그렇게 우리를 한없이 '그곳'에 머물게 했다.
우리는 이창동이라는 이름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봉준호도 홍상수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색깔, 이창동만의 '지독한 생의 사유'와 그것을 담아내는 '이야기의 미덕' 그리고 그만이 만들어내는 '예술적 아름다움'이리라. 영화 <시>가 커다란 울림으로 사람들 마음을 두드렸던 이유, <오아시스>가 사람들 마음에 스미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나만의 숨으로 완성된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초록물고기>에서 <박하사탕>에서 <오아시스>에서 <밀양>에서 <시>에서 그는, 심장을 후벼 파는 집요함으로 우리 안의 순수함을 사랑을 가족을, 그럼에도 계속되는 시간을, 고통 속에도 피어나는 삶을 이야기하였다. 그 안에는 언제나 심장을 때리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은 '이창동이 아니면 만들어질 수 없는 이야기' 였으며 '이창동이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보편적인 이야기감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이창동표'로 다시 태어났고, 이창동의 고유한 숨이 들어간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본성에 그대로 닿아 마음 깊은 곳을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동안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던 감독님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껏 표현하고 싶다. 청춘의 한 복판, 내가 깊은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었을 때 나를 건져주었고 나에게 등불을 밝혀주었던 한 세계. 그 목소리. 그 눈빛. 그 마음. 모두를 귀하게 여겼던 그 깊고 넓은 정신.
내게 '이창동'이라는 이름은 봄과 같다. 첫사랑과 같다. 나는 이창동이라는 이름이 언제나 설렌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들려줄 이야기에 언제고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가 만든 세계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여전히 내 안 깊은 곳에서 푸르게 살아 숨 쉬고 있기에. 그렇게 그는 다시, 박하사탕의 향기를 품은 채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이창동 감독님이 소설가가 아닌 영화감독으로 있어줘서 고맙다. 그렇게 계속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우리 곁에 있어주기를. 그렇게 박하사탕의 알싸함처럼 처연한 우리네 생을 또 나지막이 속삭여주기를.
영호가 사진 찍던 모습 그대로 다시. 순임이 앞에 서주기를.
나는 기다린다. 내가 그의 세계로부터 보았던 것들이, 여전히 내 안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한.
나의 첫 책. 노벨 문학상도 아닌 신인 문학상도 아닌, 무명 작가의 서툰 첫 책 뒷장에 실린 감독님 이름.
이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고 일어날 수 없던 일이었다. 감독님의 이름에 행여나 누가 될까 어깨가 무거워 말을 아끼고 있기도 하였다.
감독님께서 읽은 내 글이라고는, 20년전 처음 뵈었을 때 서툴게 썼던 시 들과 보내드린 편지들이 다였기에. 어느 날 내가 없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얘가 글을 잘 쓴단 말야..." 그리고 내게 말씀하셨다. "한 상상력 하잖아"
영화 <밀양>을 만드실 때는 사무실이 내가 살던 집 바로 밑에 있었다. 감독님은 언제든 편하게 놀러오라셨고 나는 옆집 드나들 듯 놀러갔다. 마지막으로 감독님을 뵈었던 때는 오래 전이다. 하지만 늘 마음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했다. 그리고 너무나 큰 선물을 받았다. 부끄럽게도. 감사하게도.
감독님께서 축복해주신 그 마음에 폐가 되지 않는 길을 걷고자 한다. 영원한 나의 감독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내 영원한 감독님 이창동 1편
(메인사진 : 이동진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