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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서치 힐데 Jun 07. 2024

지금은 후회하는 그때의 결정

분명 옥수수처럼 가지런했더랬다. 20대 시절, 내가 기억하는 나의 치아는.


어느 순간부터 교정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윗니는 그대로인데 유독 아랫니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관찰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 나는 최근에서야 이 현상의 주범을 찾았다. 불규칙적인 치열을 초래한 장본인은 바로 다름 아닌 사랑니 2개였다.




20대에 사랑니 2개를 발치했다. 다행히 곧게 자리 잡고 있어서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사랑니를 내 곁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아래 사랑니 2개를 발치하지 않겠다는 것 역시 20대에 내린 결정이었다.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20년도 더 된 예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린다. 가장 큰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 사랑니와 달리 아래 사랑니는 더 커서 뺄 때 아프다는 주위 이야기에 잔뜩 겁이 났었다.

 

아래 사랑니가 조금씩 잇몸을 뚫고 나올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발치의 두려움이 번번이 치통을 이겨내게끔 만들었다. 버티기 힘들어 치과에 갈까라는 용기가 솟아날 즈음엔 이상하게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몇 차례 이런 고통을 감내하고나니 사랑니 두 개가 어금니 뒤편에 거대한 산처럼 우뚝 자리 잡았다.




사랑니가 있어서 뭐가 좋은지는 아직도 사실 잘 모르겠다. 사랑니는 철이 들면 나는 거라던데, 사랑니 2개 분만큼 내가 더 성숙해진 건지는 자신이 없다. 나무위키는 어금니를 상실할 경우에 대비해 보험처럼 두면, 임플란트 시술을 대체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랑니를 발치해서 어금니의 빈 공간에 넣는 대공사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뒤늦게 내 입안에 자리 잡은 사랑니들은, 그네들보다 더 일찍 내 꺼였던 영구치들의 자리를 살금살금 뺏어갔다. 가지런히 자리 잡았던 치아들은 사랑니 2개가 뺏어간 자리만큼 서로 공간을 나눠야 했다. 앞니들이 서로 겹쳐지면서 삐뚤빼뚤해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송곳니 옆 제1 작은 어금니 한 개는 아예 치아 방향을 틀어서 잇몸 안쪽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20년 전에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냥 눈 질끈 감고 사랑니를 뽑았을 듯싶다. 그러면 지금은? 더 이상 나빠질 게 없을 것 같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될까? 조금이라도 더 나빠지기 전에 지금이라도 빼는 게 나은 선택일까?




인생은 늘 이렇게 일련의 선택의 연속이다. 답을 알고 난 후에 푸는 문제는 쉽다. 답을 알기 전 문제는 아리송하기 일쑤다. 정답이 공개될 때까지 불확실성 속에서 지내야 한다. 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다 살아봐야지만 진정한 정답을 알 수 있기에, 대부분의 문제는 킬러문항처럼 어렵게만 다가온다.


발치의 고통을 유예했더니 치열의 균형을 잃었다. 뒤늦은 고난이 삶의 배열을 바꾸듯, 뒤늦게 찾아온 사랑니는 평화롭게 자리 잡고 살아가던 내 치아들의 자리를 헝클어버렸다.


치아의 개수가 많을수록 어른 대접을 했다는 역사서를 근거로, 사랑니 두 개가 온전히 있어 치아 개수가 30개인 나는 곧잘 어른 코스프레를 했더랬다. 사랑니가 아예 나지 않은 생일이 빠른 동갑내기 친구에게 내가 더 어른이라고 으스대기도 했었다.




알고 보니 사랑니는 인류진화 역사에서 사라져 가는 중이었다. 셀룰로스를 소화시킬 능력이 없는 인류는 한 번이라도 더 씹어야 했고, 사랑니는 질긴 음식을 먹을 때 요긴하게 쓰였다. 하지만 이런 과다 저작기능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게 된 인류는 턱뼈가 좁아지도록 진화되어 왔다. 결국 갈 곳 잃은 사랑니는 좁은 턱뼈 안에서 제 자리를 못 찾고 더러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고투 중이다.


아는 것만큼 세상은 보인다. 사랑니 흔적조차 없는 친구가 알고 보니 나보다 더 진화된 우월한 유전자의 보유자였다니. 다음에 만나면 꼭 전해줘야겠다.


찾아보니 사랑니 발치 전문병원도 있다. 그동안 뽑은 사랑니를 쌓으면 후지산 높이를 뛰어넘는다고 한다. 무려 18만 개가 넘는 사랑니를 발치해, 작년 12월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10분 안에 사랑니를 뽑는다고 하니, 사랑니를 뽑을 만큼 용기가 생긴다면 이 병원을 선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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