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서치 힐데 Jun 30. 2024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얼마 전부터 갖게 된 일요일 리추얼이 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뉴욕타임스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쉐도잉을 한다. 7시부터 진행되는 스터디를 준비하는 차원이다. 8시쯤 스터디가 끝나면 외출 준비를 하고 교회를 간다.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무너지기 직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발걸음 한 곳에서 깊은 감화를 받고 시간이 되는 주일에만 찾는 선데이 신자지만 담임목사님 말씀이 좋아서 계속 찾게 된다.


오늘 스터디 주제는 내가 고른 거라서 더욱 흥미로웠다. 주제는 조기 퇴직하는 법. 파이어족(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을 위한 기사였지만, 조기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생계를 위한 일터에서 퇴장해야 하니, 실상 모든 직장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기사일 듯싶었다. 사브리나 테버니스의 진행 아래 에이미 왕이 조기퇴직을 희망하거나 이미 그 꿈을 이룬 이들을 만난 경험을 나눴다.


가장 인상적인 조기퇴직러는 알렌 왕이라는 중국계 미국인이었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아처럼 버림받아 자란 그의 아버지는 고생 끝에 뉴욕에 정착하고 쉬는 날도 없이 고된 일을 이어간다. 알렌 왕은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짬도 없이 일하는 아버지를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실직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알렌은 조기은퇴를 결심한다. 운 좋게도 그는 20대 초반에 만든 앱 중 하나가 대박이 나면서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되고 25세에 은퇴한 후, 10년 동안 조기은퇴를 위한 멘토링을 하며 지내고 있다.




이 기사 중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더 이상 일이 없는 나 자신을 어떻게 정의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파이어족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전직 00, 현직 00이라는 설명이나 직책 없이도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You don't belong to work.
You belong to yourself.


며칠 전부터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는 배우, 최강희 씨의 간증영상을 보면서 문득 이 문장과 결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브라운관을 떠나 가사도우미 등 이색적인 일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간간이 접했는데, 간증에 이어 그녀가 쓴 책까지 읽고 나니 투명하고 솔직한 이라는 생각이 든다.


달변은 아니지만 힘 있고 진솔한 고백. 신앙인으로 사는 게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제약이 많아 보이지만 오히려 이런 삶이 더욱 자유롭게 한다는 그녀. 새벽기도를 다니며 매일 새 날을 받아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그녀. 팬의 슬픈 소식을 알게 되면 장례식장에 찾아가고, 모르는 이에게 골수이식을 해주고, 자신의 피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내어줘서 헌혈 유공장까지 받은 그녀.


하지만 그녀는 밝아 보이는 겉모습 뒤로 너무 힘들어서 간신히 버티던 나날이 있었다. 자신의 본모습이 들킬까 두려워 초조해하며 술과 담배를 벗 삼아 홀로 고통스러워했던 과거. 배우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이제 그녀는 구태여 '일'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자유로운 3년을 보낸 후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연기'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복귀를 위한 작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자칫 속도를 내며 질주하게 된다. 최소한 월급루팡은 되지 않게끔 한 사람 분의 몫은 제대로 해내고 싶다는 양심에, 일잘러로 존중받고 싶다는 열망이 한 스푼 더해질 때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문제는 열망이 욕망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다급한 마감 기한을 지켜내기 위해 일에 가속도가 더해지면 질주본능이 삶의 균형을 깨는 건 순식간이다.


번아웃이 될 즈음에 생체시계가 이상반응을 감지하고 '일단정지' 사인을 보낸다. 급제동이 걸린 질주는 정주로 대체된다. 하지만 일단 멈춤 모드로 지낸다는 게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건 두렵다. 보직자리는 제한되어 있고, 후보는 넘쳐난다. 언제 떠밀려 갑자기 책상을 비워줘야 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주말, 늦은 밤 가리지 않고 요청하는 자료 요구에, 투덜대면서도 꾸역꾸역 응하는 이유다.


질주와 정주의 변주곡을 연주했던 지난 22년간 커리어 중에서 올 상반기는 단연코 질주의 연속이었다. 상반기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날, 오늘은 출근을 안 해도 되려나 약간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할 즈음, 연락을 받았다. 생계를 위해 어쩔 없이 증명해야만 하는 삶을 살고 있는 한, 글쓰기라는 취미보다는 일이 언제나 우선순위일 수밖에 없기에 이제 그만 글을 마무리하고 집을 나서야겠다.


이렇게 부지런히 증명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는 증명하지 않아도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일상과 만날 수 있겠지? 자유로운 날을 기다리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