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개설하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어려움을 뚫고 공동 현관 앞까지 간신히 도착했건만... 한국에서 나름 '배운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낯선 파리에서는 매일매일 영화 <덤 앤 더머>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다.
두 달 남짓 오매불망 기다렸던 비자가 드디어 발급이 되어 "파리지엔느 되기"라는 인생 목표를 이루기 위해 프랑스에 도착한 지 만 일주일이 지났다. 샤를 드골 공항 노조가 올림픽을 앞두고 파업 예정이라고 해서 부랴부랴 출국을 했는데, 다행히 이번엔 파업은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열쇠를 세 번 사용했다. 대문, 공동현관, 그리고 방문 앞에서. 대문과 공동현관은 전자식 열쇠를 터치해서 사용했다. 나만의 전용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무게감 가득한 고전적인 열쇠를 이용해야 한다. 문도 육중하기 이를 데 없는 방화철문이다.
파리에 입성한 저녁, 열쇠 사용법을 익혀 방안까지 들어와 무사히 하룻밤을 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레토르트 죽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집 밖으로 나가려는데 공동현관에서 옴짝달짝할 수 없었다. 밀어봐도, 당겨봐도 소용이 없고, 전자식 열쇠를 터치하려 해도 키판 비스무레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방탈출에는 영 소질이 없었는데, 파리에서 방탈출이라니... 아니 집탈출인가? 한참 실랑이 끝에 집 나간 이성의 끝자락을 간신히 잡고 눈 크게 뜨고 살펴보니 손잡이 아래쯤 새끼손톱의 절반만 한 크기의 원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그걸 누르니 공동현관문이 열렸다.
자신감 뿜뿜해진 상태로 대문 앞으로 가서 터치를 위한 동그란 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왼편 벽 언저리에서 드디어 찾았다. 승전보를 울리며 당당하게 집 밖을 나서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현지생활 경험담을 여러 편 읽었지만, 그 누구도 이런 사례를 전해준 바 없었다. 하지만, 정착 새내기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공유하니 비슷한 이야기가 넘친다.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전문가들과, 영어로 때로는 버벅거리는 초급 불어로 의사소통하며 매일매일 도전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은 출근 전에 집 근처 거리를 3km 달리면서 '파리에서 마라톤 참여하기'라는 다음 목표를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이행 중이다.
불어와 영어실력을 동시에 향상할 수 있는 기회로 가득한 이곳은 내게는 천국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토록 꿈꿔왔던 이곳에서도 한숨과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현지인들의 느린 행정과 불편한 서비스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 와이파이, TV를 결합한 서비스를 신청했지만, 아직까지 미완이다. 점심시간마다 통신 대리점에 매일 방문도장을 찍고 있다. 와이파이 모뎀을 받으러, TV 이더넷을 받으러, 작동하지 않는 TV 이더넷을 반납하러, 안내에 따라 진행했지만 여전히 먹통인 TV에 대한 문의를 하기 위해...
와이파이만 설치하고 TV 연결은 안 된다면서 포기하고 가버린 설치기사에게 100유로 이상을 지급해야 한다. 여전히 TV가 안 나오고, 문의전화를 해도 영어 안내 서비스는 전혀 없는데, 기술자를 다시 부르면 16만원 남짓 비용부담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여기서는 일상다반사다.
고객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근로자 입장에서는 행복한 곳임이 분명하다. 개점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에 찾아간 집 앞 빵집 문 앞에는 다음 주부터 한 달간 휴가를 간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파리지앙과 파리지엔느들은 한 달 바캉스를 위해 11개월 동안 돈을 번다는 이야기가 문득 기억난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너무 익숙하기에, 은행계좌 개설을 위한 상담을 받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프랑스 문화에 적응하려면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듯싶다. 쉼 없이 살아온 삶의 가속도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 못해, 매일매일 계획 세우며 미션을 클리어하는 삶이 아직까지는 더 편안하긴 하지만, 왠지 이 새로운 일상에 금방 스며들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