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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허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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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튼 May 02. 2019

죽음을 계속 생각하는 제 자신이 무서워요

서툰 사람들의 짙은 대화





여튼(가명) : 사실 몇 주 전부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생각하기 싫어도 자꾸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과학, 영어, 수학 과목들에서 쉽게 맞힐 거라 생각했던 문제들도 어이없이 틀리는 저를 보고 심각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시험도 못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를 풀 때마다 자꾸 제가 집중을 못하고, 실수할 때마다 너무 제 자신이 싫어지더라고요. 학원이 5층인데 만약에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플까. 그런 생각도 문득 듭니다. 


허튼 : 용기 내어 말해줘서 고맙다. ‘지금 죽고 싶다’가 아니라 ‘지금 죽으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는 것 같네. 상상이 점점 구체화되니까 고통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런 스스로가 무서워지고. 죽음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자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보니 지금 모습이 너무 낯설고 당황스럽고. 이제 중학교 3학년이라 학업에 더 신경 쓰고 싶은데 그마저도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 걱정되고 답답한 마음이겠지.


여튼 : 맞습니다. 너무 벗어나고 싶어서 학교에서 한번 상담도 받았는데 전혀 안 고쳐지네요.


허튼 : 어떤 얘기가 오고 갔는지 물어봐도 될까?


여튼 : ‘죽는다면 어떨까요?’ 여쭤봤더니 상담 선생님께서 제가 죽으면 엄마, 아빠, 가족들, 친구들, 선생님들 모두 충격 먹어서 제대로 못 산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허튼 : 그 외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저 말을 들었을 때 네 심정은 어땠어?


여튼 : 계속 비슷한 얘기를 반복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좀 뭐랄까.. 위로가 되진 않았어요.


허튼 : 상담 선생님도 예상치 못한 발언에 많이 놀라셔서 저런 말씀을 하셨을 거야. 그렇다 하더라도 저 말은 네 압박감을 더 가중시키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남겨진 사람들이 슬프니 네가 힘들더라도 참으라는 의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내가 너였다면 고민이 풀리는 게 아니라 남을 걱정시킨 것 같은 죄책감이 생겨버렸을 것 같아.


여튼 : 정확하십니다. 제가 괜히 얘기를 털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듣는 내내 뭔가 마음이 많이 불편했습니다. 


허튼 : 그랬구나. 사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야. 평소 고민하지 않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떠올린다는 건 상상하는 힘이 길러진 거고, 사유하는 폭이 전보다 깊어졌다 볼 수 있지. 나도 16살 때 죽음이라는 원초적인 주제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로잡혀 있었어. ‘죽고 싶다’는 패배감이 아니라 ‘죽는다면, 죽음이란 뭘까’ 풀리지 않는 의문들 때문에 죽음을 다루고 있는 수많은 책과 영화를 봤어. 그렇게 많은 책과 영화들은, 너랑 나처럼 죽음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지. 책을 읽으면서 뾰족하게 해결되는 건 없었어. 적어도 내가 뭔가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막연한 공포에 떠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웠지.


여튼 : 정말 그런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저는 무조건 벗어날 생각만 했지, 왜 그랬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궁금해하면서도 무조건 안 된다고만 생각했어요. 당장 제 실수가 드러나니 조급했습니다. 차라리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봤으면 괜찮았을 것 같아요.


허튼 : 너의 상상을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음은 누구나 겪지만, 겪은 후기를 들려주지 못하는 영역이라 더더욱 아직 겪지 못한 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잖아. 무작정 제거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좀 벗어나서 당장은 힘들지만 내가 이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 연습이 필요해 보여. 죽음에 사로잡힌 생각 말고도 일상생활에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니?


여튼 : 미워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일상생활 압박감이라면 어떤 건가요?


허튼 : 자신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와 타인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 수준이 너무 높은데, 높아도 이제껏 노력해서 충족시켜왔는데,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압박감.


여튼 : …… 정확하십니다. 다 무너질 수도 있다는 초조함에 제가 더 미웠어요.


허튼 : 본인이 삐걱거린 경험이 흔치 않다면, 덜컥 겁이 나지. 마치 운동화 끈이 풀린 걸 봤는데도 선뜻 묶지 못하고 달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 같잖아. 잠시 멈춰서 운동화 끈을 묶으면 되는데 당장 묶는 시간마저 아까운 거지. 내가 허리 숙여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동안 남들은 몇 미터고 앞서 나가 버릴 것 같고. 근데 잠시 풀린 끈을 고쳐 묶고 질주하는 시간, 운동화 끈이 풀린 채로 뛰다가 넘어져 결국 다시 끈 묶고 다시 일어나 뛰는 시간, 둘 중 뭐가 더 억울하고 오래 걸릴 것 같니?


여튼 : 바로 끈을 묶는 게 더 나아 보이네요. 


허튼 : 너는 지금 그 끈을 묶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항상 너를 바라보는 관중들 앞에서 사력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내려놨으면 좋겠어. 부담이 피로로 밀려오니까 정작 네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에 쏟을 여력이 없어질 수도 있어. 출발 전부터 아무리 끈을 질끈 묶어도 뛰다 보면 풀리기도 하고, 스텝이 꼬이기도 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상 못한 상황들이 와.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을 반기기도 해. 자신의 부족한 노력을 포장할 변명거리가 생가니까. 적어도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네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해. 그 노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보듬어 줘야 해. 죽음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생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노력하면 가질 수 있거든. 당장은 그게 힘들 수 있어. 네가 달려온 길만큼이나 훈련이 필요하니까. 그래도 너는 변명보다는 변화를 선택했으니까적어도 바라고 있으니까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거야너의 선택을 응원해.


여튼 : 말씀 감사합니다. 놀라울 정도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아요. 시작만 하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 스스로 기대해야겠습니다. 아직까지 제 생각이 완벽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오늘은 잠이 잘 올 것 같아요. 




3주 뒤 연락을 받았다. 

시험이 끝났고, 실수가 있었지만 적어도 선생님 덕분에 마음 편히 잘 본 것 같다고. 

고맙다고. 그 말에 내가 더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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