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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눈박이엄마 Oct 23. 2023

지속가능한 발전목표를 '적'으로 돌린 실리콘밸리 VC

앤드리슨 호로위츠의 기술낙관주의자 선언 vs 테드 창

얼마 전 '계단을 올라가는 휠체어'가 한국에서 개발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후 내가 소속된 무의가 진행한 프로젝트인 '모두의 1층(성동구에 경사로를 놓고 경사로 설치를 위한 지역 조례를 이끄는 캠페인)' 홍보 동영상에 이런 댓글이 올라왔다. "이 정도라면 휠체어가 계단을 올라가게 해서 보급해야 하는거 아니냐?" 


스위스 회사가 만든 계단을 오르는 휠체어 Scewo


언뜻 맞는 말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칫 기술을 살 수 있는 사람들 개인이 기술을 구입해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겠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엘리베이터나 경사로 같은 저기술, 비기술 솔루션을 하찮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장애를 개인이 극복할 대상으로 한정지어 버린다. 장애는 대다수가 '사회적 장애'다. 몸이 불편해서 생기는 장애보다 신체적 장애를 장애물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적 장애가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몸에 칩을 박아서 척수장애가 있는 일부 사람들을 걷게 만들 수 있으니, 지금 휠체어 이용자에게 당장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사로를 놓기 위한 사회공헌이나 제도 개혁에 투자하는 건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인 것일까? 누가 설마 이렇게 말할까 싶지만, '기술 유토피아'를 주장하는 실리콘밸리의 상당히 많은 VC들은 실제 이렇게 생각한다. 단기적 자선에 투자하느니 장기적 기술에 투자하는 게 인류의 미래에 더 낫다는 거다. 이런 사상엔 이름도 있다.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다. (뱀발: EA를 가장 열렬히 주장했던 사람은 누구였더라? 바로 샘 뱅크먼-프리드다. 고객 돈으로 투기해 천문학적인 사기로 기소된 크립토 거래소 FTX의 CEO말이다. ) 


샘 뱅크맨-프리드가 EA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는 사실은 EA마저 비판받게 만들었다 (뉴욕타임즈)


오해는 하지 않기를. 나는 기술의 팬이다. 기술 개발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좀더 정확히 말해, 기술을 개발하는 사이에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로테크, 비테크 해결책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기술 낙관주의가 기술 아닌 법제도나 상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칫 못 보게 만드는 성향을 경계하자는 쪽이다. 


그래서 지난 주 실리콘밸리 전설적인 투자자인 마크 앤드리슨이 세운 유명 VC 앤드리슨 호로위츠에서 나온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문(Techno-Optimist Manifesto)'을 보고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요지는 기술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는 성향이 팽배한데 이에 대항해 극도의 기술 낙관주의를 가져야 한다는 것.  


기술낙관주의자들은 사회가, 마치 상어처럼,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믿는다....
기술낙관주의자들은 반능력주의에 반대한다. (중략)
우리에겐 온난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에어컨이란 기술을 발명했다. 
우리에겐 팬데믹 문제가 있다. 그래서 백신이란 기술을 발명했다.
우리에겐 빈부격차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풍요함'을 창조하는 기술을 발명했다. (중략)
우리의 적은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나쁜 아이디어다.
현 사회는 지난 60년간 기술과 삶을 위축시키는 대규모 선동에 직면해 왔다. 

그 다양한 선동의 이름으로는 '존재론적 위기' '지속가능성' 'ESG' '지속가능개발목표' '사회적 책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사전예방원칙'(개발 전 환경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 '신뢰와 안전(trust and safety)', '기술윤리' '리스크관리' '탈성장(de-growth)', '성장의 한계' 등이 있다.
(후략)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무한 성장과 능력주의는 바람직한 것이며, 이에 반기를 드는 모든 생각은 기술의 '적'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왼쪽. 앤드리슨 호로위츠 홈페이지의 '기술 낙관론자의 선언문' / 오른쪽. 앤드리슨 호로위츠 대표인 마크 앤드리슨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투자와 함께 다양한 분석 보고서를 내는 실리콘밸리의 '싱크탱크'역할로 전세계 테크 투자자들이 눈여겨보는 소위 '테크 트렌드세터'이자 전세계 기술투자계에서 매우 영향력이 큰 곳이다. 이들이 점찍은 크립토, 웹3, AI에 투자자금이 몰렸던 역사가 있다. 그런 VC에서 기술에 조금이라도 비관적인 태도 자체를 경계하는 수준도 아닌 '적'으로 간주해 발표한 이 선언에 대해 미국의 테크 미디어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읭?'이었다. 



ESG야 미국 정치계에서 거의 동네북 수준으로 두들겨 맞고 있으니 (솔까말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한데 때려넣어서 정량지표를 개발했다는 것 자체에도 문제가 있으니) 그렇다손 치자. 하지만 UN 지속가능개발목표(UN SDGs)'의 이름으로 기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지구온난화를 가짜뉴스로 취급하는 사람들과 다를 게 무언가?  


그 중에 지난 10월 20일 시애틀에서 열린 긱와이어 서밋에 나온 테드 창('당신 인생의 이야기' 등 과학소설 작가)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테드 창. 긱와이어 서밋 중 


“기술은 어떤 문제를 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기술적 솔루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기후위기는 아마도 기술로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빈부격차도 기술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의 상당수는 정치적 의지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선언문은 이 모든 현실을 그대로 외면하고 있습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성장은 언제나 좋은 것’이란 주장에 대해)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하게 성장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는 ‘성장 경제’에 대한 대안, 즉 안정적인 상태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물리법칙에 따라 어느 순간에서는 더 이상 커지기를 멈추기 때문입니다."


테드 창이 AI에 대해 <뉴요커>지에 기고했던 글 제목이 기억난다. "챗GPT는 웹의 희미한 JPEG다" - JPEG 이미지가 언뜻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확대해 보면 픽셀이 다 깨져 있다. 원본을 합성하고 또 합성해 컨텐츠를 만들어내는 AI에 대한 경계의 글이다. 이게 테드 창이 '기술 비관론자'라서 그런 걸까? 천만에.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게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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