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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향에 취하던 날

“마이 싸이 팍치” 첫 태국 여행때 갔을 때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했던 말이다. “팍치(고수) 빼주세요”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영어로 ‘노 팍치’라고 하고 다녔지만 영어가 안 통하는 식당에서 써먹었다가 수북이 쌓인 고수를 본 후 가이드북을 뒤져서 알아냈다. 가이드북에 적혀 있다는 건 그만큼 고수를 못먹는 한국인이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니 공감할 것이다. 처음 고수를 먹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마치 입에다가 샴푸 한 통을 통째로 짜넣은듯한 그 냄새를.


잠깐 파주에 산 적이 있다. 마침 군대 동기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가서 밥을 먹었다. 평범한 밥상이었다. 밥을 한 술 떠넣고 습관적으로 김치를 집었다. 살면서 맡아본 적 없는 냄새가 났다. 그래봤자 김치가 김치겠지, 입에 넣었다. 오 마이 갓, 김치에서 샴푸 맛이 났다.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예의상 뱉지는 못하고 친구에게 물었다. “야 김치가 도대체 왜 이러냐” “아 그거? 너 고수 안 먹어봤어? 파주에선 김치 담글 때 많이 넣어 먹는 풀인데. 이래야 김치 맛이 확 살아” 나는 그 후로 절대 그 친구의 집에 가지 않았다. 세상에 그냥 풀도 아니고 샴푸 냄새 진동하는 풀을 먹다니. 


지중해가 원산지인 고수는 고려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순우리말이 ‘빈대풀’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조상들도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후예인 나역시 질색팔색할만큼 싫어했던 게 당연하다. 그랬던 고수를 언젠가부터 즐겨먹게 됐다. 계기는 사소했다. 이미 고수에 맛들인 형들과 쌀국수집에 갔다. 형들은 따로 고수를 청해 넣으면서 나를 비웃듯 바라봤다. 넌 어른이 아니란 듯이. 사내들이란 때때로 이럴 때 승부욕을 부리곤 한다. 난 형들보다 정확하게 두 배 더 많은 고수를 쌀국수에 투하했다. 머리 감을 때 눈에 들어간 샴푸를 억지로 씻어내듯 육수와 숙주의 향을 압도하는 고수 냄새를 견디고 먹어 치워 버렸다. 그 형들과 만나서 쌀국수를 먹을 때 마다 반복했다. 나도 버젓한 어른이라는 듯이.


향이 강한 음식들의 공통점이 있다. 처음엔 곤혹스럽가도 어느 순간 인이 박힌다. 홍어 마니아들이 ‘ㅎ’자만 들어도 침을 흘리듯 고수에 인이 박히고 나니 그 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감돌게 됐다. 쌀국수집, 정통 중국요리집을 갈 때 마다 산더미처럼 고수를 쌓아올린 후 일행들의 경외스러워하는 눈빛을 즐기게 된 것이다. “이래야 음식 맛이 확 살아”라는 멘트를 날리며. 


얼마전 방콕을 다녀왔다. 꼭 10년만의 방문이었다. 어쩌다가 한국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식당에 갔다. 팟타이에도, 똠양꿍에도 고수가 없었다. 방콕까지 와서 이렇게 밍밍한 태국 음식을 먹게 되다니, 실망스러웠다. 이 식당 주인은 하도 한국 관광객들의 “마이 싸이 팍치” “노 팍치”에 시달려 아예 레시피에서 고수를 빼버렸으리라. 어쩌면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식당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짐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은 짜오프라야 강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었던 돼지고기 요리였다. 저온 조리한 삼겹 부위를 튀겨 낸 후 으깬 호박과 레몬그라스, 그리고 고수와 함께 먹었다. 껍질은 바삭하고 속살은 부드러웠다. 석양이 아름다웠다. 강 건너 왓 아룬의 황금빛 조명이 고수의 향과 어우러졌다. 고수의 맛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태국을 온전히 즐기게 된 기분이었다. 


한겨레 '김작가의 해먹거나 사먹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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