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앤 세바스찬과 코로나
그 날의 바람과 맥주맛을 기억한다. 2010년 여름, 지산밸리록페스티벌. 해가 뉘엇뉘엇 기울 때 쯤 벨 앤 세바스찬이 무대에 올랐다. 첫 내한이었다. 공연이 무르익을 때 쯤, 기다리던 노래가 연주됐다. 1998년 작품인 <The Boy with the Arab Strap>의 수록곡, ‘"Sleep the Clock Around’이었다. 밴드도 팬들도 모두 풋풋했던 시절의 노래다. 밴드는 그 후 넉장의 앨범을 내놨고 팬들도 그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을 테고, 결혼을 앞둔 사람도 있었을 터다. 옆의 커플은 껴안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노래가 보슬비처럼 지산 리조트를 촉촉하게 적실 무렵, 남자는 주머니 속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꺼내 여자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속삭였다. “결혼해줄래?”
이미 그들과 돗자리에 앉아 벨 앤 세바스찬을 기다리며 연신 맥주를 마신 터였다. 취하진 않았어도 얼큰했던 차였다. 그 말 한 마디에 술이 확 깨고 말았다. 이런 프로포즈를 생각할 수 있다니, 내가 그의 여친이었다면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가가 축축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들은 함께 벨 앤 세바스찬을 들으며 많은 데이트를 했을 것이다. 오랜 연애 끝에 마침 벨 앤 세바스찬이 내한을 했고, 여친보다는 동성 친구들과 페스티벌을 누비곤 했던 그가 여친을 끌고 여기에 왔을 것이다. 결국 이토록 낭만적인 프로포즈를 해내고야 말았다. 남아있던 맥주를 한 방에 들이켰다. 아름다워서, 부러워서. 순간 스쳐갔던 2000년 어느 날의 일이 떠올라서.
2000년 5월, 서늘했던 저녁 바람은 선선해지고 첫 잔을 들 때까지 해가 지지 않는 계절이 돌아왔다. 푸르기만 하던 공원에도, 여자들의 원피스 위에도 색색의 꽃이 피었다. 새로운 세기와 함께 갓 사회로 나온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10분 지났을 뿐인데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녀에겐 핸드폰이 없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그녀가 보였다. 큼직한 꽃이 프린팅된 흰 나시 원피스에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본 순간,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오직 그녀만이 유채색이었다. 단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이제 두번째 만나는 거였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아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홍대앞의 음악 술집은 신촌과는 사뭇 달랐다. 신촌은 우드스탁, 레드 제플린, 도어스 등 60-70년대 록의 아이콘들을 간판에 걸고 그 때 음악만을 LP로 틀었다. 신촌의 변방에서 자기 색깔을 갖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 홍대앞의 음악 술집들은 동시대 음악을 틀었다. 스미스, U2 같은 가게를 시작으로 드럭, 헤븐 등의 전설적 가게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던 록, 펑크, 레게 등 그 이전 세대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던 음악과 수입 맥주들이 주류였다. 그 중 하나가 벨 앤 세바스찬이었다. 지금은 명동 수준으로 바글거리지만 그 때는 황량했던 골목 2층에 있었던. 물론 위에 말한 그 벨 앤 세바스찬에서 따온 이름이다.
98년을 기억한다. 당시 최고의 음악잡지였던 <서브>의 앨범 리뷰 코너에 그들의 두번째 앨범 <If You're Feeling Sinister>가 소개됐다. 만점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팀이었다는 거다. 라이센스는 커녕 수입조차 아직 안됐다. MP3? 그런 거 없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길래 만점이냐, PC통신 음악 동호회에서는 추측만 오갔다. 결국 수입으로나마 그 앨범이 소개됐다. 그리고,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수줍은 소년처럼 나긋하게 떨리는 목소리, 어쿠스틱 기타와 현악기들이 이끄는 사운드,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설레는 포근한 멜로디가 어우러진 벨 앤 세바스찬의 음악을 세상은 챔버 팝(chamber pop)이라 불렀다. 그들은 일렉트릭 기타가 지배하던 세기말의 홍대앞에서 말없이 방구석에 은거해있던 이들의 지지자가 됐다. 엘리엇 스미스와 더불어 벨 엔 세바스찬은, 어떤 취향의 작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그 가게에도 그런 소년 소녀들이 몰렸다. 음악 술집의 왁자지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큰 볼륨으로 들어도 시끄러울 수 없는 음악들이 깔리곤 했다. 작은 언사에도 상처받기 일쑤였던 아이들이 섬세한 대화를 나누며 맥주병을 홀짝 거렸다.
과음할지라도 취하기 조심스럽던 그 곳에 그녀와 마주 앉았다. 코로나를 시켰다. 병 안에 레몬 반조각이 있었다. 탄산이 레몬조각을 감싸며 올라왔다. 16년만에 만났어도 조금도 변치 않은 떨림이 심장을 감쌌다. 나이를 먹고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진 감정의 결들은 뇌를 감쌌다. 어렸을 때 보다는 나이가 많았고 지금보다는 훨씬 어렸던 신세기의 5월, 능수능란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딘가는 서툴렀고 어딘가는 정제됐다. 격정적이되 선명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는 맥주를 홀짝였다. 하고 싶지만 해선 안될 것 같아 머뭇거릴 때는 심호흡하듯 들이켰다.
카페에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커피는 마셔 버리면 그만이지만 맥주는 얼마든지 더 시킬 수 있으니까. 커피잔에 10여분씩 손을 대지 않는 건 일상이지만 맥주병을 내버려 둔다는 건 특별하니까. 외롭게 만든 만큼의 긴장이 감돈다는 확증이니까. 평소같으면 네 병은 너끈히 비우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내 앞에는 단 두 병이 있을 분이었다. 맥주병 너머 있던 그녀는 어느덧 내 옆에 있었다. 끝내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그 말. 대신 입을 열었다. 10년 후 만약 우리가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다면… 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충분했을 것이다. 그녀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벨 앤 세바스찬의 따끈한 신곡 ‘There’s Too Much Love’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일어났다. 일주일, 딱 일주일을 남겨 놓고 있었다.그녀의 결혼식을 일주일 남겨둔 주말이었다.
꼭 10년이 지났다. 오랜 연인에서 막 예비 부부가 된 의식을 치룬 커플이 옆에 있었다. 무대 위에는 벨 앤 세바스찬이 연주하고 있었다. 또 한잔의 맥주를 집었다. 누군가 데낄라를 마시기 위해 가져온 레몬을, 나는 그 날의 코로나를 생각하며 맥주가 담긴 플라스틱 컵에 퐁당 빠뜨렸다. 탄산이 순식간에 레몬을 감싸고 올라왔다. 레몬껍질의 쓴 맛이 혀를 감쌌다. 그 날의 바람과 맥주맛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Beer Post 5월호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