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사건에 붙여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났다. 여전히 머리와 마음이 무겁다.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프리즘이 됐고 포스트잇으로 덮인 강남역 10번 출구는 추모와 충돌을 실시간으로 비추는 스크린이 됐다. 치료를 요할 만큼 정신이 아파본 적도 없고, 한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40년을 살아온 입장에서는 이 프리즘과 스크린을 보며 말을 아끼게 된다.
의도하지 않은 섣부름에 괜한 불편함을 더할까봐 그렇다. 하지만 이 신중함의 고려 대상에는 어떤 남성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사건의 가해자를 비난하고 희생자를 애도했으며, 평소 성범죄 관련 형량이 너무 낮은 게 아니냐고 비분강개하며, 선거 때 새누리당을 찍지 않은, 이 사건이 ‘여혐 살인’이 아닌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이라며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는 남성들 말이다.
이 사건의 법적, 형사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판단할 도리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끄집어낸 평범한 여성들의 아픈 과거와 두려움이다. 그들이 털어놓은 고백에서 일상은 늘 보이지 않는 위험이었다. 어두운 밤거리, 혼자 타는 택시,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에서 여성들은 마음이 편할 수 없다. 혹시 몰카라도 설치되어있을까봐 화장실 벽에 붙은 나사못이 두렵고, 밥벌이를 위한 사무실에서조차 성희롱은 유의미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국민안전처에서 제공하는 생활안전 서비스 지도에서 ‘여성 밤길 성폭력’ 항목을 체크한 후 내가 사는 홍대앞을 살펴봤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젊은이들이 모이는 그곳, 그중에서도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일수록 유혈이 낭자한 듯 지도가 시뻘겠다. 사람이 적은 곳이건, 많은 곳이건, 미어터져 나가는 곳이건, 불안은 공기 한쪽에 숨어 있다.
그래도 억울할 것이다. 내 주변에선 그런 여자를 본 적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당연하지. 초등학교 때 성폭행당한 이야기를 지나간 연애 이야기처럼 남성에게 털어놓을 여성이 얼마나 있겠나. 아직까지도 성폭행 피해가 주홍글씨가 되는 사회에서 말이다. 그런 극단적인 경험이 아니더라도,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온갖 불쾌한 경험들이 역치 아래의 분노가 되어 묻히고 흘러간다. 만원 지하철 속 의도치 않은 신체 접촉조차 불안과 의심으로 이어지는 건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경험 때문이다.
여전히 억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생활을 벗어나 미디어로 가보자. 한국에서 젊은 여성이 스타덤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은 걸그룹이 되는 거다. 그조차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지만 배우나 방송인에 비하면 그나마 진입 장벽이 낮다. 걸그룹이 된다는 건, 철저히 자신을 소비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맞게 자신을 가공하는 것이다. 벗은 거에 진배없는 옷을 입고, 유사성행위에 가까운 춤을 추며, 유혹하는 눈빛으로 카메라를 바라볼 때 평범한 소녀는 아이돌이 된다.
단, 전제가 있다. 함부로 자의식을 드러내면 안된다. 우리는 한창때의 아이돌이 욕망을 드러낼 때 어떤 봉변을 겪는지 설리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확인한 바 있다. 짜인 섹스 어필을 하면 열광의 대상이 되지만, 개인 SNS에서 욕망을 표현하면 논란의 타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거세된 채 남성들의 판타지에 맞춰 활동하는 걸그룹을, 일반 남성들은 ‘삼촌 팬’이란 안전장치 속에 숨은 채 수용한다. 그런데 실제 조카가 눈앞에서 그런 옷과 그런 춤을 선보이면 흐뭇해할 삼촌들이 얼마나 될까. 무엇보다 같은 아이돌을 해도 여성은 남성보다 활동상의 제약이 많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혐오는 상징적 단어다. 한국 사회에서의 성별 권력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다만, 그 장치에 비하와 성적 대상화, 복속시키고자 하는 인식 같은 것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일간베스트, 메갈리아로 대변되는 양극단의 행위에 분노할 필요는 없다. 심사할 때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의 평균값으로 최종 점수를 매기듯, 이 사건의 여파로 드러나고 있는 여성들의 불안과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고 수용할 때 좀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믿는다. 성별을 막론하고 개인의 아픔이 보호받고, 욕망이 인정되는 사회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성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묶인다 해도, 당신이 손해볼 것은 고작해야 기분 나빠지는 것밖에는 없을 테니까.
경향신문 5월 26일자 '문화와 삶'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