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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Jun 12. 2023

2023, 다시 부산


그 날 부산은 거짓말처럼 화창했다. 서울은 주말 내내 정말 1분도 쉬지 않고 비가 퍼부었다던데, 광안대교 뒤로 보이는 하늘은 수채화로 칠한듯한 맑은 하늘색이었다. 바다에 윤슬이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그 사이로 아이들이 오동통한 다리를 반쯤 담근 채 첨벙거리며 놀고 있었다. 친구들, 연인들, 가족들 단위로 놀러온 사람들은 하얀 모래 사장에 풀썩 주저 앉아 날씨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푹푹 걷다가 잠시 앉고, 다시 일어나 모래를 훌훌 털고 걸었다. 집에서 멀리 왔구나, 나 여행왔구나, 실감됐던 첫 순간이었다. 



부산은 정말 자주 와본 곳인데다, 귀를 때려박는 한국어, 여기가 거기고 거기가 여기같은 익숙한 풍경들 때문에 국내여행은 어딘가 여행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다. 로밍도 환전도 교통패스도 필요없어서 준비할 것도 없는 국내여행은 처음부터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늘 여행을 시작할 때보단 여행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가 떠나왔음을 자각하는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어떨 땐 갑자기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어떨 땐 달리는 차 밖 풍경을 보다가, 또 어떨 땐 아침에 일어나 내 방이 아닌 곳에서 눈을 떴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그 날 서울 친구들의 비소식으로 가득한 SNS를 끄고 마주한 파란 하늘의 광안리는 마치 외딴 섬에 온 것 같았다. 시공간이 현실에서 붕 떠 있는 어딘가 비현실적인 아틀란티스같은 섬.



부산은 내가 사는 서울을 제외하면 가장 자주 간 곳이라 새롭지도 낯설지도 않다. 가끔 왕래하는 친척의 집에 가는 것처럼. 3시간 좀 안되는 시간을 기차로 달리다보면 어느새 서대구, 동대구를 지나 마지막으로 부산에 도착한다. 남쪽이니까 더 더울 거라는 편견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열심히 달려와 이제 막 종점에 정차한 기차의 열기 때문인지, 기차에서 내리면 늘 후끈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겨울에 가도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은 없다. 부산역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골라탄다. 서울 같으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창밖 풍경들. 버스가 더 멀리 달릴수록 여기저기서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하는 사투리.



고등학교 입학 전 엄마와 언니랑 왔던 부산. 21살 호기롭게 대학 입학 전 친구와 왔던 부산. 갓 친해진 대학동기들과 여름 방학을 맞이해 무더위를 뚫고 왔던 부산. 남자친구와 처음으로 여행을 갔던 것도 부산. 여기는 그때도 왔었는데, 그때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여긴 누구랑 왔었더라 하며 들춰볼 기억들이 많이 묻어있다. 늘 비슷하게 들뜨는 기분으로 매번 다른 곳으로 향했던 여행들. 

이번에 다시 간 부산은 여행하는 내내 지금까지 왔던 부산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장소가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 같았다. 새해에도 실감나지 않았던 20대 후반을 이제서야 맞이하는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이 본 바다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보며 뜬금없이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빛을 받아 수면 위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노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호시절임을, 이 순간을 내가 언젠가 다시 떠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폭신하고 따뜻한 모래 위에 가만히 앉아 내가 벌써 20대 후반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좋은 한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온몸에 짜르르 퍼졌다. 

섬같은 해변가에 앉은 사람들은 나에게 무관심했고, 그 기분좋은 무관심 속에서 나는 조용히 현실을 자각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있지 않은 것 같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영도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숙소 옥상에서 산을 등진 채 본 부산항대교와 반짝이던 야경, 민소매 옷을 입고 나왔을 때 딱 알맞게 팔을 감았던 공기의 온도,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왔던 청사포의 한 조용한 카페, 도시의 인공 불빛들 사이를 가르던 요트 위, 버스킹과 폭죽으로 불야성을 이루던 밤의 해변가, n번째 여행 끝에 이제서야 드디어 먹어본 부산역 앞 밀면까지. 2023년의 부산은 기억 속에 오래오래 은은한 향처럼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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