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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Aug 25. 2023

결국 체해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던 하루의 일과를 꾸역꾸역 다 소화하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시간은 벌써 밤10시. 이 시간을 위해 아껴둔 영상들을 보려고 유튜브를 딱 켰는데 갑자기 심한 메스꺼움이 깜빡이를 키지도 않고 예고없이 밀려왔다. 얼른 활명수 하나를 꺼내서 원샷을 하고 다시 누운지 정확히 1분 만에 화장실로 뛰어갔고, 결국 그날 먹은 저녁을 다 게워냈다. 활명수의 효과에 감탄할 겨를도 주지 않고 토는 사정없이 울대를 치며 나왔다. 얼마만에 이렇게 대차게 체한건지. 조금 진정되자 애초에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던 기운까지 다 빠져버려 선풍기 앞에 멍하게 앉아 칼칼한 목을 부여잡고 침만 꼴딱 꼴딱 삼켰다.

오늘 저녁에 먹은 미역국이 화근이었고, 하필 제일 빡센 필라테스 강사님의 수업을 들은 것이 또 다른 화근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이 30분밖에 안됐다는 점도. 밥 먹은 직후에 운동한 내 잘못이지만, 평소에는 괜찮았는데 이렇게 심하게 체한 걸 보면 저녁을 급하게 먹은 게 분명하다.




최근 들어 누가 빨리 먹으라고 몽둥이를 들고 감시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급하게 먹는 버릇이 생겼다.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내가 1등으로 접시를 비우고 민망함에 괜히 젓가락으로 접시를 톡톡 건드렸던 게 한 두번이 아니다. 급하게 해치워버리는 건 먹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건 전부터 그래왔지만, 짧은 영상 하나도 1배속으로 보지 않는 나다.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인터넷 강의를 2배속으로 듣는 데에 도가 터서 아무리 빨리 말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급기야 쉴 때 보는 영상들까지도 모조리 2배속으로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하트시그널까지도 1.5배속으로 봤으니 말 다 했다. (넷플릭스는 왜 1.5배속이 최대일까?) 재미는 없지만 보기 시작했으니 마지막화까지는 봐야지, 그런데 시간은 아까워, 하면서 몽글몽글한 감성의 연애 프로그램들마저 빠르게 감아 봤다. 둘 사이의 어색한 정적, 뜸들이는 고백의 말까지도 모두 배속을 해버리니 속 터질 일은 없다는 장점은 있지만 감성도 같이 없어져버렸다.

요즘 다니는 회사의 통근 시간은 편도 30분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짧은 시간조차도 아까워 나중에 촬영을 위해 참고하면 좋을 레퍼런스들을 핸드폰으로 찾아본다. 아침부터 뻑뻑한 눈은 피곤해 죽겠다고 하는데, 잠시 눈을 붙일 생각도 안하고 어떻게든 자투리 시간을 필요한 부분에 갖다 붙여 쓰고 그걸 스스로 뿌듯해한다. 마치 퍼즐 맞추는 느낌이랄까. 작은 시간의 구멍이 생기면 '옳다구나!'하고 금새 채워버리는 재미에 빠졌다.

스냅 촬영을 하고나서는 모델님께 "제가 평일에는 다른 일을 해서..보정은 한 2주 정도 걸려요" 해놓고서는 평일에 퇴근 후 미친듯이 작업해 기어코 일주일 내로 완성된 보정본을 보내드린다. 소소하게 하고 있는 원고 외주일도 내 휴식 시간을 건들기 싫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사이 시간을 활용해 글을 쓴다.

그래서 이렇게 아득바득 지켜낸 소중한 '나의 시간'에는 무엇을 하냐고? 생각해보니 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간 또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또 무언가를 하고 있으니까. 결국 절대 오지 않는 미래같은, 신기루같은 시간을 위해 일상을 급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10분만 자고 싶다','몸이 2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만성 피로를 얻게되었다. 원래도 이런 편이기는 했지만, 여기에 최근엔 회사일까지 시작하니 문제가 터질 수 밖에.  




"요즘 들어 느끼긴 했는데, 삶의 템포가 너무 빠르다고 해야하나." 어처구니없이 체한 딸의 등싸대기를 때리려는 엄마에게 말했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 모든 일을 허겁지겁, 헐레벌떡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가 쫓아오는 꿈은 안꾸는 게 다행이다. 바로 직전 글에 '맛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이런 글을 써놓고서는 현실은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들을 덩어리째 삼키고 있었다. 왜 인간은 어딘가에 크게 머리를 부딪혀야 비로소 문제점들이 보이고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만에 극심한 소화불량을 느끼고 나니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깨닫았다. 너무 심하게 토하느라 터진 실핏줄들로 양볼에 생긴 빨간 점박이들은 교훈 값이다. 모든 일을 지금보다는 0.8배속으로, 그래도 다 소화해낼 수 있으니까. 출퇴근 때 지나는 올림픽대교에서는 꼭 창밖도 봐주고, 길을 걸을 땐 생각을 의도적으로 비우면서 주변에 보이는 것들에 생각을 맞추기. 내 일에만 너무 매몰되어 주변을 보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도록. 밥 먹을 땐 꼭 한 숟갈을 20번 이상 씹어 넘기기. 놀 때도 '여기 끝나고 어디가야되지?' 생각하지말고 그 시간에 집중하기. 빨리 감겨 헝크러져버린 카세트 테이프 구멍에 검지를 넣어 되감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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