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닐 거야
모든 것, 모든 곳이 한 번에. 과연 가능한 말일까요? 그것이 존재한다면 아마 ‘무한’의 세계일 것입니다. ‘에블린’이 여행 중인 멀티버스는 모든 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무한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것은 환상이고, 이를 실현하려 한다면 곧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조부 투파키’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는 ‘베이글’의 형상은 우주의 블랙홀을 연상시킵니다. 무한한 밀도와 중력으로 인해 빛을 포함한 그 아무것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인 블랙홀은 미지의 영역이면서 무한의 영역입니다. <인터스텔라>의 ‘쿠퍼’가 블랙홀을 통과하다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곳으로 진입하게 된 것을 보면 ‘베이글’의 존재는 그 모든 것이 존재하는 블랙홀, 즉 영화 제목 그대로 <ㅇㅇㅇㅇㅇ>를 뜻합니다. ‘조부 투파키’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을 자기 손에 넣고 싶었던 것이 아닌, 그 무한의 세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베이글’에 몸을 내던져 파멸을 맞이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완벽한 세상은 의미가 없습니다(여기서 세상이란 탄생과 죽음, 인간과 인간 사이 모든 관계, 혹은 자연의 이치 등 넓은 의미를 담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원하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얻게 된다면 더 이상 우리 삶의 의미란 사라집니다. 허무와 공허만이 남겠죠.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고, 그 완벽의 기준마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부조리한 사실은 ‘에블린’과 ‘조이’가 멀티버스를 오가다 마주한 돌덩이의 모습으로 설명해줍니다. 휘몰아치는 화면 전환이 이루어지다 갑자기 광활한 대지 앞에 나타난 두 돌덩이의 대화 장면은 정적과 자막만으로 우리를 압도하며 영화의 어떤 그 장면보다 집중을 이끕니다. 이 장면에서 <ㅇㅇㅇㅇㅇ>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견딜 수 없어 하는 우리를 달래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찮은 돌 밖에 안되는 인간이 블랙홀과 같은 우주의 원리를 고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려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니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정작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말이죠. 우주 어딘가의 알 수 없는 행성에서조차 그 돌은, 그중에서도 ‘에블린’의 돌에는 가짜 눈알이 붙어있습니다. 생명도 살지 않는 행성의 돌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지라도 눈을 뜨고 나와 서로를 바라보니 속마음을 터놓는 대화도 할 수 있나 봅니다. 이 진솔한 대화를 통해 우리는 멍청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아니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진리가 아니라는, 아니 어쩌면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인간의 오만한 생각이 과거에는 절대 진리였던 것처럼 말이죠. 세상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 상상해본다면,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인간들(과학자와 철학자, 정치인…)의 고군분투와 논쟁이 우습게만 느껴지지 않을까요?
인간이 멍청하고 하찮은 존재라기보다(그렇기도 하지만), 합리적 성질(우리가 생각하기에)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우리 식대로 이해하려 억지를 쓰다 보니 만물을 이해할 수 없고, 하찮고 멍청한 존재로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래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부조리함을 느낍니다.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부조리한 것도 아닙니다. 자연의 이치 속에서 그저 존재하는 세상이, 인간이 정한 이치나 도리에 맞게끔 있는 것이 아닐 뿐입니다. 이러한 부조리 철학에 대한 글을 쓴 알베르 까뮈도 전철을 타고 가려다 탄 친구의 차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말이죠. 우리의 삶과 세상은 떼어 놓을 수 없기에 우리의 삶에 부조리함이란 존재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그래서 <ㅇㅇㅇㅇㅇ>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시키려 합니다. <ㅇㅇㅇㅇㅇ>의 멀티버스 세상에서는 다중 우주를 오가는 ‘버스 점프’를 통해 다른 우주에 있는 자신의 능력을 빌릴 수 있습니다. 특기도 재주도 없었던 ‘에블린’은 ‘버스 점프’를 해야만 이 우주를 구할 수 있습니다. ‘버스 점프’를 하려면 누구나 예측 못할 뜬금없는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양쪽 신발 바꿔 신거나, 립밤을 꺼내 씹어먹거나, 종이로 손가락 사이 사이를 베고, 트로피를 엉덩이에 처박는 등…. 이런 행동들은 코미디의 요소가 되기도 하고 액션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영화를 버라이어티하게 만들어줍니다. 왜 ‘버스 점프’를 하려면 우스꽝스럽게 돌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다중 우주의 세계에 뛰어들어 내가 가질 수 있는 모습을 마음대로 오간다는 것은 ‘버스 점프’를 해야하는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모습만큼이나 어이없고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ㅇㅇㅇㅇㅇ>는 멀티버스의 환상에 우리를 끌어들임과 동시에 결국 현실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우리의 삶과 세상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이 부조리 속에서, 온 우주가 파멸을 맞을 이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글의 제목으로 따온 노래의 가사처럼, 그러니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합니다. 세상이 나에게만 가혹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그렇다고 가치 없는 존재도 아닙니다. 삶의 그 의미는 ‘너와 나’ 그 사이에서 생기니까요. 그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과 행복이 단 한 줌의 시간일지라도,’ 너여야만 하는 이유니까.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인 그다음 단계로 왔습니다.
너와 나, 서로를 믿고 손을 잡아야 합니다. 허무와 공허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나는 나비
우리도 막상 멀티버스 세상에 뛰어들어 다른 인생을 사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허무와 공허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빛나고 화려한 인생을 사는 나의 모습을 보면 지금의 내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의미 없는 존재처럼 보일 테니까요. 수많은 후회의 선택을 한 삶을 살아가는 ‘에블린’이, 볼품없고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삶이, 그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무한한 버스 점프의 가능성을 가져온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 이것은 우리의 존재와 의식, 현실의 삶 그 자체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상태라고 말해줍니다. 자신의 가능성이 모두 실현된 세상을 보고도, 지금 여기의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후회뿐인 삶이라도, 지금의 내가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은 직접 바꿀 수 있는 미래이니까. ‘에블린’과 결혼하지 않고 각자 성공한 삶의 세상에 사는 ‘웨이먼드’는 그녀에게 다음 생에는 당신과 빨래방을 운영하면서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성공한 삶을 사는 세상에서도 결국 평범한 지금 나의 모습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초라해 보이면 어떻습니까. 인간의 손가락이 소시지 모양을 한 채로 진화한, 그저 우습게만 보이는 세계에서도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못 친다면, 발가락으로 연주해서 좋아하는 음악을 즐길 수 있습니다. 멀티버스의 여정이 끝나고 ‘에블린’은(혹은 우리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고, 다음으로 곁에 있는 가족을 있는 그대로 다정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현실의 자신이 가장 중요한—그 모든 가능성을 가진— 존재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ㅇㅇㅇㅇㅇ>는 이토록 다정한 영화입니다. 모든 것을, 모든 곳을, 한 번에 때려 박은 베이글처럼 혼란스럽고 어지럽기도 하지만, 너무 친절한 나머지 14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아무도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해주려 고군분투하는 것 같습니다. <화양연화>의 이별 연습 장면, <라따뚜이>가 떠오르는 너구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인류의 진화 장면 등 재미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재치 있는 장면과 액션까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많은 것을 눌러 담았지만, 우리에게 주려는 의미만은 확실히 담았습니다. 나에게만 가혹한 것 같은 세상에도,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보이는 삶도, 결국에는 살만한 인생입니다. 아니 함께한다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미래를 손에 쥐고 있기에 의미 없어 보이는 인생이지만 정답이란 없으며,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듯 <ㅇㅇㅇㅇㅇ>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에, 감히 올해 최고의 영화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을 준 그가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도 <ㅇㅇㅇㅇㅇ>의 멀티버스 환상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의 날개를 활짝 펼칠 현실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알베르 까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