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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S Jan 18.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 ①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인생이란,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어른이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혹한 현실 앞에서 세상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쉬울까요. 살다 보면 노력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할 때도 있을 거고, 어쩌면 건강하던 나에게 뜬금없이 큰 병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행이 겹치다 보면 세상은 나에게만 가혹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이 매번 잘 안될 때도 이런 생각을 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면 우리는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 탓을 하곤 합니다. 만취한 운전자의 운전대는 하필 꽃다운 나이의 청년에게 향하고, 공사장의 무거운 철근은 하필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누군가의 위로 쓰러집니다. 모든 이들에게는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항상 사연 있는 누군가에게만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듯한 착각을 하곤 합니다. 어디서나 의미 없는 죽음은 없을 텐데 말이죠.


 때로는 우리의 과거를 탓하기도 합니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혼신을 다해 준비한 시험 날 긴장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내가 너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양한 가정 앞에 나의 삶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상상 혹은 후회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다른 세상의 나는 나보다 더 잘 살고 있을 터이니까요. 지금 이 삶을 이렇게 만든 게 내가 했던 선택 때문이니까. 후회뿐인 삶이더라도 바꿀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앞으로의 삶은 우리가 바꿀 수 있기에.



 여기에 모든 가정과 상상의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멀티버스 세계에서는 내가 했던 작은 선택과는 다른 길을 택한 그 모든 가능성의 모습이 존재하는 평행세계를 직접 오갈 수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 동네의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양자경)’은 동성애를 인정해달라는 딸 조이(스테파니 수)와 이혼을 요구하는 웨이먼드(키 호이 콴)에 시달리기도 모자라, 세탁소 세무조사까지 그녀를 괴롭힙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느닷없이 자신이 알파 웨이먼드라 말하는 남편에 의해 혼돈에 빠진 멀티버스 세상으로 뛰어들게 되고, 그 혼돈의 세상을 구할 유일한 사람이 바로 ‘에블린’ 자신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됩니다.


 앞으로 이 영화를 송형국 평론가의 아이디어를 빌려 약칭 <ㅇㅇㅇㅇㅇ>이라 부르겠습니다. 제목의 각 어절에서 첫 자음을 딴, 극 중 가장 중요한 소품인 ‘베이글’과 ‘눈알’을 닮은, ‘ㅇ’의 모양이란 시작도 끝도 없이 순환한다는 기막힌 아이디어를 빌려 쓰고 싶었습니다.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포함한 상세한 내용을 다루어 이야기하겠습니다.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영화는 ‘에블린’과 그녀의 주변의 인물들 사이 불협화음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애인을 인정해주지 않는 엄마가 미운 딸과, 딸이 그저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엄마의 모녀 관계를 넘어, 처음부터 딸이 아닌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와 착하고 순진하지만 바보 같은 모습이 못마땅한 남편, 엉터리 세무신고를 지적하는 세무 조사관까지. 모두 ‘에블린’이 못마땅해하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인물들과 부딪혀 마찰음을 내며 이야기는 달려갑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며 알아가는 세상의 이치가 <ㅇㅇㅇㅇㅇ>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자신과 자신이 원하는 타인의 모습, 혹은 내 안에 존재하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과 화해하고 사랑하라는 말이 이 영화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의 첫 단계는 ‘나’를 이해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블린’이 가족들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원하는 이상과 그들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이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멀티버스에 빠져든 ‘에블린’에게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그녀에게 상황 파악할 시간도 주지 않습니다. 간신히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상태인지 조금씩 알게 될 때쯤, 이 모든 가능성의 세상을 파멸시키러 온 ‘조부 투파키’와 처음으로 조우합니다. 이때 ‘에블린’이 뜬금없이 얼굴에 피를 흘리며 어린 아기의 복장을 한 채로 죽어 쓰러지는 듯한 모습을 갑자기 보여줍니다. 여기서 ‘에블린’이 갑자기 ‘아기의 모습’을 하는 것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인간 내면의 그림자, 즉 콤플렉스를 파악하려면 유아기에서부터 일어난 일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과,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부정하고 싶은 나의 내면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과정에서 필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이겠지요. 과격한 표현이지만, 암 덩어리를 꺼내려면 살을 찢고 몸 안을 뒤적여야 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큰 고통을 수반합니다. ‘버스 점프’를 하려면 강인한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멀티버스에 접속하자마자 세무 조사관이 괴물이 되어 그녀를 괴롭힌 이유는 단지 그때의 ‘에블린’에게 세무 조사는 큰 스트레스였고, 딸의 모습을 한 ‘조부 투파키’가 그녀의 멀티버스 세계를 완전히 파멸시키려 하는 이유는 그녀의 가장 큰 문제가 딸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즉, ‘에블린’이 옮겨 다닐 수 있는 멀티버스 여행은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있었던 모든 사건과 그 사건의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 모든 세상, 혹은 그녀의 이상(理想)을 모두 담은 세상을 오갈 수 있음으로, 그녀의 내면을 선명하고 투명하게 바라보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에블린’이 태어나서부터의 기억으로 시작합니다. 멀티버스를 오가면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의 실망한 표정, 어린 시절 친구와 뛰어놀다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던 일, 커서는 순진하고 능력 없는 에드워드와 결혼하면 족보에서 없애버리겠다 호통치는 아버지의 모습 등 안 좋은 기억을 계속해서 마주합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받았던 상처들은 지금까지의 ‘에블린’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남편 ‘웨이먼드’와 결혼하여 새로 얻은 집에 실망했던 기억과 딸 ‘조이’에게 상처 주었던 기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에블린’은 멀티버스를 오가는 과정에서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ㅇㅇㅇㅇㅇ>의 중요한 소재인 ‘가짜 눈알’에 주목해야 합니다.



 ‘웨이먼드’는 세탁기와 세탁물 등 뜬금없는 곳에 자꾸 가짜 눈알을 붙여댑니다. ‘에블린’은 이를 발견할 때마다 짜증 내면서 떼버립니다. 이 눈알은 사실 자기 내면을 바라볼 눈을 억지로라도 뜨고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웨이먼드’가 자꾸 가짜 눈알을 붙여대는 이유는 ‘에블린’이 가족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부리는 투정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다정함을 ‘에블린’에게 가르쳐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우주를 구하기 위해 맞서 싸우려는 ‘에블린’에게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이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그에게 세상을 구하는 방식이란 싸움이 아닌 다정한 사랑의 힘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내면을 향한 눈의 ‘시선’이란 바깥으로 향한다면 말이 조금 달라집니다. 영화의 후반, 알파 세계의 인물들이 저마다 콤플렉스를 형상화한 모습(이들을 지휘하는 ‘에블린’의 아버지는 전동 휠체어 로봇이 된 모습을 보니 아마 휠체어에 의지하는 자기 모습이 싫었나 봅니다)으로 보통의 ‘에블린’과 적대합니다. 그들은 모두 총을 겨눈 채 ‘조부 투파키’의 파멸을 막으려는 ‘에블린’을 저지하려 하는데요. 결국 ‘에블린’이 이마와 온몸에 총을 맞고, 그 총알들은 모두 가짜 눈알이 됩니다. 여기서 총알은 ‘타인의 시선’, 즉 ‘에블린’이 본인의 삶을 사는데 총알처럼 박힌 세상의 시선입니다. 본인의 사랑과 결혼조차 아버지에게 당당하지 못하고, 가수의 꿈도 펼치지 못했던 ‘에블린’의 삶에서 세상의 시선이란 총알처럼 잔인하게 박혀왔던 것들이겠죠. 이것들을 받아들인 순간 ‘에블린’은 모든 것을 이겨내고 튕겨냅니다. 마침내 수많은 눈알은 자신에게 총을 겨눴던 모두에게 눈을 선사합니다.


 ‘에블린’이 튕겨낸 눈알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그녀 또한 이마에 눈을 떨어지지 않게 다시금 붙여 ‘베이글’에 몸을 던지려는 ‘조부 투파키’를 말리러 갑니다. 그녀에게 총구를 겨누며 방해하던 그들은 그녀가 각자의 컴플렉스를 해결해주자(떠나간 아내의 향수를 그리워하던 손님, 척추를 다쳐 움직이지 못했던 이웃…) 비로소 행복을 되찾은 듯한 표정을 하며 쓰러지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남편과 아버지는 결국 힘을 합하여 ‘조부 투파키’가 베이글로 뛰어들어 파멸을 맞이하는 것을 막습니다. 결국 ‘에블린’이 멀티버스 여행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받아들이는 과정은 가족과 함께하는 힘을 만들어 세상이 공허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위기를 막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시리더라도 두 눈을 뜨고,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정한 사랑으로 위기의 세상을 구원하는 첫 단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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