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일어난 걸 아는 사람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던 사촌 오빠와 어머니, 그리고 기숙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 두 명뿐이었다. 교수에 대한 분노 덕분인지, 나는 주눅 들지 않고 지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나서 다음학기에는 "Student Council"(학생회) 선거가 있었다. 그때 나와 같은 학과에 재학 중이었던 남사친 상현(가명)은 과에 나 이외의 유일한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넌 영어 잘하니까 한번 나가봐!"
"에이, 내가?"
"네가 뭐?"
"아니... 나에 비하면 너무 잘난 애들이 너무 많잖아."
윌리엄, 세레나
캐이틀린, 사브리나
나랑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 중에는 미드에서 주인공 급, 또는 한 인기 끌었을 것 같은 비주얼과 캐릭터의 당당하고 매력적인 친구들이 많았다. 윌리엄 - 뭔가 윌리엄 왕자스러운 느낌의 금발의 파란 눈 남자, 세레나 - 영국 재벌 (그녀의 아파트는 대궐 같았다), 캐이틀린 - 금발에, 몸매, 얼굴 모두 매력이 넘쳤다, 사브리나 - 그녀는 필리핀계 미국인 혼혈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비주얼의 소유자로 동양인에게서 거의 절대 못 보는 콜라병 몸매 그 자체에 긴 곱슬 파마머리를 가지고 속눈썹은 내 속눈썹 두 개를 있어 붙인 것처럼 길었다. 나중에는 비욘세의 백업댄서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승리"가 필요했고, 상현의 부추김에 못 이기듯 학생회 선거에 나가기로 했다. 1학년 중에는 다행히도 나, 그리고 사실 기억이 잘 안나는, 약간 존재감이 부족한 친구가 다였다. 1학년은 학생회 부회장 포지션으로 박에 나갈 수 없었다.
드디어 학생회 선거일 당일이 왔다. 학과 로비에는 다과(캐이터링 푸드)가 깔려 있었고, 교수님들, 그리고 출마하는 후보들과 그들의 친구 몇 명들만 있었다. 소파에 옹기종기 앉아있는 사람들은 20명 남짓 되었다.
'으아.. 왜 이리 떨리지... 분명 1000명 정도 앞에서 모의 유엔 연설도 한 나였는데'
아무래도 영어 좀 한다는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영어를 잘했던 나였지, 원어민 친구들 앞에서 모의 유엔도 아니고, 진짜 "선거" 연설을 한다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현이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상현이 앞에서 연설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임하기로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고, 나는 나의 여성 알토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에 집중하며 유세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 나는 한국에서 왔고 내 이름은 밸러리야. 일단 영어가 내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 양해 부탁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미국에서, 그것도 유수한 대학인 뉴욕대학교의 학생회 임원이 되려는 것은 나는 내가 나처럼 멀리 타국에서 온 여러 재학생들을 대표해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는 미국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지만, 낯선 타국에서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적응해 나가는 어려움을 누구보다 많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 다양한 문화, 사회적 배경의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 그리고 신설 인문과인 우리 과의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 나도 조금 방황은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내가 앞장서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어. 이상이야."
자신 있는 미소를 띠었지만 상현이 옆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온통 졸아 있었다.
"나 어색했지? 목소리 정말 떨렸지? ㅠㅠ"
"어? 아니, 너 목소리 전혀 안 떨던데? 전혀 긴장 안 한 사람처럼 보였어. 잘했으니까 걱정 마."
상현이의 위로에 힘을 얻은 나는 차분하게 다른 후보의 연설을 들었다. 드디어 투표시간이 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교수님과 관심 있는 학생들만 참여했다)이 투표를 해나갔다. 한 표, 한 표 개표가 되었고 나는 다른 후보를 겨우 두세표 차이로 이겼다.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글로벌 리버럴 스터디즈 학생회 부회장, 밸러리 리!"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현과 나는 키득키득거렸다.
"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학생회 선거인데 사람들이 20명 정도밖에 안 온건 좀 오바지 않냐?"
"솔직히 학생회 해도 뭐 큰 도움 안되니까 그런 거 아닐까"
"후보가 나 말고 한 명 밖에 없어서 겨우 이긴 듯. 아무래도 내가 동양인이어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지만, 다른 후보도 인도계 미국인 아니었어?"
"그래? 나 이긴 거 좋아해도 되는 거지?"
"그래 야, 잘했어. 자랑스러워."
상현은 그렇게 좋은 친구였다. 어느 날은 내가 늦잠을 잘 까봐 모닝콜도 해주고, 커피를 사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상현이 혹시 나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내 기숙사에서 자는 게 무서워서 다른 친구의 기숙사에서 자고 잇던 밤에 상현이 전화가 왔다. 잠깐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보자고. 뭔가 예감이 왔다. 그렇다, 나는 생에 두 번째로 고백을 받게 될 것이다. 워싱턴 스퀘어는 눈이 아직 소복이 쌓여 있었다. 노란색 조명 아래에 상현이가 푸근한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상현이에게 다가갔다.
Snowy Evening in Washionton Square (google)
"어.. 내가 나오라고 한건..."
"응"
"그니까.. 어.. 나는 네가..."
"아, 사실 알아."
"알아?"
"응."
"...."
"근데... 나는 솔직히 지금 연애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아.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
"...."
"솔직히 지금 사귀어봤자 뭐 우리가 결혼까지 갈 확률이 있긴 하니? 난 아니라고 봐. 결국 결혼을 안 하면 연인은 헤어져. 그러면 결국 친구도 못되게 되는 거고. 나는 오히려 우리처럼 좋은 관계는 오래 길게 친구로 지내는 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 네 말도 맞다."
상현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상현과 짧은 포옹을 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상현과 마음이 같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날 이후 늘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그 일이 있지 않았더라면, 상현의 고백을 받아줬을 수 도 있었겠다는 생각. 하지만 내가 상현에게 말했던, 진짜 좋은 사람일수록 친구로 오래 지내고 싶다는 그 말은 내가 뭔가 나에게 더 많은 감정을 품은 다른 남사친들에게도 했던 말이기도 했던 만큼 진심이었다. 특히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나는 누군가를 정말 잃을 수 도 있는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았다. 상현 까지도 만약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상현이 덕분에, 그리고 그때 무슨 이유에서든지 나를 부회장으로 뽑아준 여러 교수님들과 학생분들 덕에 자존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상현은 몇 학기 이후 군대를 갔고, 우리는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지금도 그 당시에 상현에게 이 말을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