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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lerie Lee May 11. 2023

잔인한 평화로움

인간은 고통을 필요로하는 존재다

그런날이 있다. 너무나 잔인하게도 평화로운 날. 그래서 공허한 날. 불안하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날. 누군가에게는 축복과 같을,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임이 확실한 날.


오늘은 내게 그런날이다.약 50일간 쓰던 대본이 엉망이라는걸 깨닫고 지쳐 번아웃이 와서 하루정도 아무것도 안해야지 싶어 가만히 있는 중인데, 사실 나는 잘 알고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꼭 굳이 훌륭한 업적을 남겨야 할 사람이 안되도 된다는것을. 나까짓 사람이 좋은 대본 하나 쯤 못남겨도, 내가 심지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세상엔 아무 타격도 없을것이란 걸.


영화나 드라마 세상의 자극적인 뉴스에도 몰입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는 허구이고 또 하나는 이미 벌어진 일이라 내가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지금 내 눈앞의 현실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감동도 슬픔도 기쁨도 느낄 수가 없다.


한참을 멍하니 숨만 쉬며 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나? 앞으로 말고 그냥 지금 무엇을 원하나? 나는 뭔가를 느끼고 싶었다. 행복 설렘  슬픔 등. 행복과 설레임은 돈을 주고 사거나, 마인드셋을 바꿔야 올 수 있는 값진 느낌이라면 반대로 고통은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잘 줄 수 있겠더라. 예를 들면 막국수를 먹은다음 한강을 3KM정도 뛰며 고통을 느낄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아니면 차라리 풀리지 않는 대본을 붙잡고 다시 낑낑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내 맘대로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의 사람에게 카톡을 하나 보내 또 한번 마음의 파동을 느낄 생각을 하니 이 숨막히는 잔인한 공허가, 평화가 깨질 생각을 하니 살아있는것 같았다.


그리고 또 다시 내 스스로가 선택할 직장이나 학교라는 감옥에 내가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니 지금의 평온한 자유가 꽤 달콤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사람에겐 고통이, 또는 고통에 대한 기대가 필요한것 같다. 사람에게 어쩌면 가장 잔인한 상태는 평온하고 공허한 상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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