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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Nov 26. 2023

《아아! 동양화: 이미, 항상, 변화》

(2023. 7. 14. ~ 10. 9.) 작가 소개글

권순영(b. 1975)

권순영은 2000년대 초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가 동양화 재료로 그림을 시작한 시기는 퓨전 동양화가 등장한 시기였다. 그러나 작가는 동양화의 담론이나 역사성, 전통적 소재와 장르에 거리를 둔 채 자신의 체험과 내면세계에 집중했다. 작가는 대상이나 사진을 보고 그리는 대신, 폭력성, 성욕, 두려움, 소외감, 슬픔, 연민, 애정과 같은 인간 본성에 관심을 두고, 전쟁이나 서커스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참조한다. 작은 존재들이 부유하는 은은한 색의 그림들은 일견 동화적이고 판타지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형상은 허구적 존재가 아닌 작가 내면에 실재하는 존재들이다. 그에 따르면, 그림은 공포를 직시하려 창조한 세계이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다. 작가가 그리는 형상들은 그의 어린 시절이 그러했듯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소외된 존재들로, 작가가 생생히 겪었던 아픔과 사람들로부터 느낀 두려움을 반영한다. 소외된 존재에 관심을 두는 태도는 재료를 선택할 때도 드러난다. 마트에서 구한 싸구려 물건은 작가의 손길을 거쳐 반짝이는 오브제가 되고, 길가에 버려진 천은 손바느질을 통해 그림을 감싸는 액자가 된다. 그는 최근 작업을 ‘고전’과 ‘마음’으로 설명하는데, 그에게 전통이란 고전을 답습하는 무비판적 태도나 계승의 무거움이 아닌, 정성을 들여 사용해야 하는 동양화 재료에 대한 사랑과 자신보다 앞서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해 낸 대가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맞는 동양화 재료를 시간을 두고 다듬으며, 자신이 연민하고 사랑하는 존재들이 살아갈 마을을 일구어 간다. 


김선두(b. 1958)

김선두는 동양화가 그림의 표준이었던 어린 시절을 거쳐 화단의 흐름이 바뀌던 1980년대 중반 한국화를 전공했다. 당시 화단에서는 한국화와 한국성이 호명되었고, 학교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집단 운동이 펼쳐졌다. 그 또한 출신 학교를 통해 《오늘과 하제를 위한 모색전》(1985)에 참여했다. 그는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 뒷골목과 포장마차와 같은 일상적 소재를 모색하는 데서 작가로서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산수화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미적인 정서가 형성된 기억 속 고향, 전남 장흥의 진경을 탐구했다. 유년기 산과 들, 바다에서의 체험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할 수 없는 풍경으로 드러난다. 만날 수 없는 연인의 마음을 상사화로 은유한 〈꽃섬〉과 같은 소박한 그림이 되었다. 작가는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이 반영된 자신의 그림을 ‘생활 산수’라 칭한다. 그가 개인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반영하며, 숭고미를 담은 이상화된 풍경이나 명승고적을 그린 그림만이 산수화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동시점으로 멀리 있는 것이 크게, 가까이 있는 것이 작게 과장된 화면은 추상적이다. 작가는 장지에 먹과 색을 수십 번 겹치는 ‘장지 기법’으로 만들어진 화면의 투명한 깊이를 깊은 맛이 담긴 묵은지에, 태필로 자유롭게 그은 철조망의 선을 남도 민요의 유장한 가락에 빗댄다. 그에 따르면, 전통은 오랫동안 습득해야 하는 기본기지만, 작가로서 독자성을 펼치기 위해서는 전통에서 해방된 자유, 즉 걸림이 없는 경지에 도달해야만 한다.


김정욱(b. 1970)

김정욱은 1990년대 중반 동양화를 전공하고 90년대 말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구체적인 인물의 초상에서 출발해  익명의 인물 혹은 인형을 그리는데, 그들의 얼굴은 성차를 드러내지 않지만,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어 작가의 젠더를 반영한 여성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커다란 눈에 머금거나 흘린다. 흑백 톤이 자아내는 엄숙한 분위기, 인물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과 날개, 머리 뒤의 광배, 독특한 수인(手印) 등은 성화나 불화의 종교적 도상을 떠올리게 한다. 두려움과 신비감. 더 나아가 종교적인 감정까지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은 어리거나 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부장제에 부합하는 이상화된 소녀나 현모양처와 같은 대상화되고 타자화된 여성 이미지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의 작품은 최근 더욱 성별이 모호한 존재, 즉 사이보그나 외계 생명체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으로 변화 중이다.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눈 또한 광선이 뿜어져 나올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그가 그린 인물에서 인간 밖의 존재를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얼굴이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선의 구성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인물을 그리는 방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한지에 먹을 수없이 중첩함으로써 화면의 깊이감을 만들어 낸다. 작가가 그리고 만드는 것들은 실존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익명성과 보편성을 지닌다. 어쩌면 그들은 작가의 내면 심리를 반영한 자화상일 것이다. 


손동현(b. 1980)

손동현은 2000년대 중반 동양화를 전공했다. 당시는 동양화단의 분위기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강령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 시기다. 작가는 기존 동양화에서 제시되지 않았던, 영화나 애니메이션, 그라피티와 같은 대중문화와 서브 컬처를 소재로 다루며 변화를 주도해 왔다. 〈영웅배투만선생상〉(2005)으로 잘 알려진 작가의 초기 작업은 정신세계가 없다고 여겨지는 대중매체의 캐릭터를 차용하고 캐릭터의 정신을 그리고자 시도함으로써 전신사조의 개념을 뒤집는 데서 시작되었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전통에 도전하여 극복하려는 의지와 전통에서 한 발짝 거리를 두는 유희를 오간다. 작가는 동양화로 뭉뚱그려지는 그림들의 모음 자체보다 동양화라는 장르가 미술계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두고 동아시아의 회화를 무한히 참조가 가능한 흥미로운 원천으로 여긴다. 그는 고전으로 여겨지는 산수화, 일본의 만화 등 동아시아의 다종다양한 그림들을 접하며 자신의 작업 방법론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작품 간의 체계를 작업을 진행하면서 구축해 나간다. 그는 기존의 동양화단에서 정신적인 것이라 여겼던 수묵을 물질적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먹의 영문 표기인 ‘잉크(ink)’의 모호한 범주에 의문을 던지며, 여러 베이스의 잉크를 탁본, 분무, 스텐실 등의 기법으로 사용하며 다양한 시도를 펼친다. 그의 작업에서 이미지로 작동하는 글씨와 인물은 깊은 연관을 가지는데, 작가는 둘을 결합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상을 만들어 낸다.


유근택(b. 1965)

유근택은 1980년대 말 동양화를 전공했다. 당시는 동양화 부흥의 흐름이 가라앉기 시작한 기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유입된 시기로, 화단의 주류는 민주화와 세계화, 전통의 현대화와 같은 거대 담론이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는 역사를 소재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할머니가 체험한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개인이 바라본 세계를 탐구하며 《일상의 힘, 체험이 옮겨질 때》(1996), 《동풍》(2002)과 등의 전시를 열어 일상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작가는 대상을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여 붓과 먹, 종이로 그리는 모필 소묘의 방법론을 새롭게 제시했는데, 그에 따르면 이는 마주한 대상과 함께 호흡하고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대화다. 이는 완성된 모습을 미리 설정하고 작업하는 행위가 아닌, 자신이 마주한 대상의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구하는 과정으로, 그의 그림은 해답이 아닌 질문으로 남아 관객이 해석할 여지를 만든다. 그 같은 작가의 태도는 대상과 거리를 둔 채 외형을 묘사하거나 일방적으로 관찰하려는 시선과 구별된다. 또한 그는 대상과 물성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먹과 호분, 아크릴과 화선지, 장지 등의 재료 실험을 지속해 왔다. 현재는 철솔로 장지의 섬유질을 일으켜 마티에르를 극대화하는데, 작가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은 물성을 화면 앞으로 끌어내면서 대상을 화면 안으로 집어넣는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작업은 인간 내면과 연결되는 미학을 찾으려는 시도였으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오히려 보편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성민(b. 1998)

이성민은 2022년 한국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동양화와 한국화라는 명칭과 경계에 얽매이는 대신 동양화로 호명되는 그림들을 데이터베이스로 삼아 자유롭게 참조한다. 작가가 동양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유희적이면서도 비판적이다. 그가 다루는 B급 문화는 기존 동양화단에서 다루던 소재와 엄숙주의에 반대되는 제스쳐다. 클럽의 조명을 받아 형광빛이 도는 인물의 피부와 모니터 화면이 내뿜는 빛을 담은 그림의 사이키델릭한 색은 담담한 색감을 강요했던 대학 교육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되었다. 비디오와 인터넷을 접하며 자라온 그에게 온라인은 자연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그림의 플랫한 표면과 레이어는 다중으로 열리는 모니터 창과 온라인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들을 반영한다. 작가는 온라인의 음모론과 같은 병리적 증상, 익명의 다수가 나눈 채팅을 작품의 소스로 수집하고, 클럽과 술집과 같은 특정 공간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이면과 현시대의 인간 군상을 주된 소재로 가져온다. 작가는 밤 문화 속 개인으로 일탈에 빠지기도 하지만, 폭력성이 담긴 디스토피아적인 측면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관찰하기도 한다. 그는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는 현실을 이미지가 충돌하는 몽타주의 방법론으로 엮어내는데, 그에 따르면 그러한 구성은 탱화와 지옥도의 다층적 구성, 일월오봉도에 나타난 음양의 공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작가가 장지에 검은색 분채로 만든 매트한 화면은 빛을 반사하는 대신 빨아들이고, 디지털 환경과 VR이 가진 욕망과도 같이 관객을 화면에 몰입하도록 한다.


이진주(b. 1980)

이진주는 2000년대 초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장르의 경계를 과의식하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위해 작업해 왔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한 낯설고 기묘한 장면, 대상, 풍경을 물을 매개로 하는 동양화의 채색 기법을 응용해 섬세하게 묘사한다. 온화한 빛으로 둘러싸인 인물을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정교하게 묘사하는 방식은 기법 면에서 조선시대 초상화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는 전통 회화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성의 신체와 내면을 주체적으로 다룬다. 또한 작품에서 인물은 눈이 가려진 채 등장하거나, 뒷모습을 보이고, 손의 동작으로써 드러나는데, 인물의 익명성과 보편성은 눈을 통해 정신을 담는다는 전신사조의 개념을 뒤튼 것이다. 그가 전통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음은 화판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두루마리를 참조한 광목천의 긴 구조를 통해 다시점과 시간성, 서사성을 탐구한다. 단번에 볼 수 없는 긴 화면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계란 일부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직시하도록 한다. 최근 작가는 캔버스를 전시 공간에 입체적으로 설치함으로써 이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전통을 비트는 그의 태도는 여백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 안료를 여러 차례 겹침으로써 무한한 깊이감과 가능성을 지닌 여백을 만들고, 셰이프트 캔버스와 공간의 관계를 통해 연속적인 여백의 구조를 창출한다. 작가에게 전통은 변화하는 것이며 비판적 해석이 가능한 참조점이다. 작가는 자신의 과거와 한국의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이 발 디딘 세계와의 접점을 찾고자 한다. 


정재호(b. 1971)

정재호는 1990년대 말 동양화를 전공하며 서구에서 유입된 포스트모던 미술을 목격했다. 그는 화가 개인의 시각으로 풍경을 그리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해 재개발 중인 근대 건축물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발전을 향한 국가주의적 욕망에서 비롯된 도시화와 같은 1960~70년대 근대 사회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현재 그는 “풍경이란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통찰을 바탕으로 청계천, 을지로와 서울의 모습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다. 현장 방문과 현지인에 대한 인터뷰, 그리려는 아파트의 맞은편에서 집요하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대상 자체에 다가가려는 리얼리즘적 태도이며, 그의 그림은 과거의 낡은 욕망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한국 사회를 보여준다. 작가는 장지와 캔버스, 동양화와 아크릴, 유화 물감의 각기 다른 물성을 탐구해 왔는데, 그에 따르면 재료의 차이는 그리기 방식에 영향을 준다. 그는 화가의 행위와 물감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장지로 근대의 흐릿해진 욕망을, 피막을 형성하는 아크릴 물감으로 오래된 아파트의 파사드를 그렸고, 매끄러운 캔버스에 유화 물감의 덩어리를 얹어 풍경의 생생한 물질성을 즉각적으로 반영한다. 재료와 대상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동양화 재료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동양화 담론이 퇴색된 듯 보이는 지금에도 논의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토대를 유지함으로써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세계를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에게 전통은 과거의 답습이 아닌, 결여를 느낀 상태에서 과거를 참조하며 현재를 직시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정배 작가가 기획한 전시《아아! 동양화: 이미, 항상, 변화》(2023. 7. 14. ~ 10. 9.)에 필자가 작성한 작가 소개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전시:《아아! 동양화: 이미, 항상, 변화
기간: 2023. 7. 14. ~ 10. 9.

공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작가: 권순영, 김선두, 김정욱, 손동현, 유근택, 이성민, 이진주, 정재호

기획, 인터뷰: 이정배

인터뷰, 소개글: 윤형신

협력: 강성은, 김진영

디자인: 방정인

주최•주관: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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