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안내서 & 소설
전시 안내서
전시의 제목 《Climber》는 수직으로 자라나는 덩굴 식물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임지현 작가의 집에서 자라나는 식물이면서, 그가 길가에서 마주한 것이기도 합니다. 덩굴 식물이 벽면을 오르는 모습은 캔버스에 달라붙어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뒷모습을 닮았습니다. 중력을 거스르며 어디로 자라날지 가늠하는 덩굴손은 다음, 그리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는 그의 태도를 닮았고, 무언가의 스침에 흔들리는 모습은 그의 섬세한 감수성을 닮았습니다. 저는 임지현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벽면을 기어오르는 가상의 세 인물을 떠올렸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 인물은 각각 ‘가짜 꽃을 틔우는 사람’, '식물 탐험가’, ‘식물의 도안을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작가나 작가의 그림, 혹은 필자인 저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지만, 무엇과도 닮은 구석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저는 고증을 명확히 거치지 않은 채 인물의 이야기가 덩굴처럼 뻗어나가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진짜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읽는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 해준 이야기에는 작가가 식물을 대하는 태도, 작가의 그리기 방식, 그리고 회화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전시의 문을 여는 서문이라기보다, 작가의 그림을 보고 쓴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짜 꽃을 틔우는 사람’
내가 조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려고 마음먹은 건 이웃집 아주머니의 집에 우연히 들른 날이었어. 그때는 이웃 간에 인사를 하고 지내던 시절이었지. 아주머니는 같은 아파트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어느 날 엄마가 동네 문구점에서 별사탕 한 봉지를 사주더니 잠깐 나를 아주머니네 집에 가 있으라고 한 거야. 그때는 문도 잘 안 잠그고 다니던 때야. 아주머니는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는지 현관문을 살짝 열어놓고 있었어. 문을 살며시 열었는데 현관부터 안쪽 깊숙한 거실까지 홍매화며, 개나리며, 동양란이며 꽃가지들이 화려하게. 아주머니는 작업대 앞에서 꽃잎을 한 장씩 들어 올려 조용히 꽃봉오리를 틔우고 계셨어. 나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종이로 만든 꽃이었어. 단 한 송이도 진짜 꽃이 없었어. 향기 따윈 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어. 어린 마음에도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지. 대신 주머니에 넣은 손을 움켜쥐었어. 여름 더위와 함께 손에 쥔 별사탕이 땀에 뒤섞여 찐득찐득. 달콤하게 녹아내렸어.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말이야. 그때 나는 꽃을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주머니는 내가 삼각함수를 익히기도 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고, 나는 그 아파트에 남아 고등학생이 되었지. 아버지는 내가 꽃에 관심이 있는 걸 탐탁지 않아 하셨어. 어머니는 꽃집 사장이 되더라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글쎄… 나는 얼른 내 손으로 꽃을 틔우고 싶었어. 조화를 만드는 건 고등학교에서도, 대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는 일이라 알아서 터득해야만 했지. 오히려 관심이 있는 여자애들과 시장에서 무엇을 사고 어떻게 만드는 게 좋을지 얘기를 나누는 게 도움이 되었어. 그 애들이랑 꽃시장에도 가고, 돈이 없으니 화분 하나를 사서 꽃 나눔을 하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고등학생 때 처음 궁리해서 만든 식물이 장미야. 고3 끝날 때쯤 코끝이 쨍하고 시린 날씨였어. 주거나 받은 적만 있지 직접 만들려니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 영 모르겠더라고. 워낙 장미가 복잡하게 생겼잖아. 그렇잖아. 그래서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냈지. 크고 도톰한 꽃잎부터 작게 말린 안쪽의 꽃잎까지. 사랑을 셈할 때처럼 말이야. 반쯤 언 손으로 꽃잎의 모양을 하나씩 따라서 빨간 종이에 오렸어. 그걸 어떻게 어떻게 풀로 붙여서 만드니 그럴듯하더라고. 그런데 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부모님이 못 보게 종이에 말아서 연필꽂이에 두었지. 보고 싶을 땐 편지 열 듯 몰래 펼쳐보기도 하고. 그 추운 날 나는 내게 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소중히 안고 지낼 꽃 한 송이 말이야. 그 장미는 내가 독립해서 단칸방을 구해 살 때까지도 책상 한구석에 줄곧 꽂혀 있었어. 그 꽃을 보며 힘을 냈지.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이 다가올 줄도 모르고… 조화를 만드는 이유는 오래 보기 위해서야. 조화에는 계절이 없어. 봄 벚꽃부터 가을 단풍까지, 계절에 따라 많이 팔리는 조화는 있지만 말이야. 요즘은 공장에서 사람을 싼값에 데려다가 조화를 만드는데, 원래 조화는 한 송이 한 송이 손으로 틔워 올려야 하는 꽃이야. 그렇게 마구잡이로 빨리빨리 식물을 찍어 내면 못써. 조화는 물을 마시는 꽃은 아니지만, 식물이 자라나는 시간까지 생각해서 만든 조화는 느낌이 다르다고. 번화가의 음식점에 있는 조화들 봐봐. 이파리가 전부 똑같은 거. 나무가 자랄 수도 없는 구석에 억지로 밀어 넣은 걸 보면 웃음도 안 나와. 식물을 직접 돌보고 관찰했다면 그렇게 할 수는 없지. 물론 그걸 구별할 줄 아는 공장장이라면 그런 건 만들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식물은 그렇게 자로 잰 듯이 자라나는 게 아니야. 한 식물에서 나온 이파리도 제각기 다르고, 같은 이름의 식물이라 해도 제각기 생김새가 다른걸. 뭐든지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 게 중요해. 그래서 나는 만들려는 식물을 꼭 길러 봐. 잎사귀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느 순간 돋아나는 새순을 발견하지 않은 사람이 꽃을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
‘식물 탐험가’
저는 식물의 원원종을 찾는 일을 합니다. 원원종이란 품종 고유의 특성을 보유하고 종자의 증식에 기본이 되는 종자로, 원원종의 발견은 세상에 없던 식물을 탄생시키는 밑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를 찾는 일은 탐험가가 하는 일과 다름없어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 탐험을 마다하면 안 되죠. 외딴곳에서 희귀한 식물을 찾는 일이니만큼 맞닥뜨릴 위험도 예측이 불가합니다. 독성 식물뿐 아니라 독충과 독사, 더 나아가서는 사람보다 더 큰 포식자를 마주할 수도 있죠. 그래서 대처할 수 있도록 배낭 안에 각종 물품을 챙깁니다. 식물의 뿌리와 씨앗, 포자를 채집할 통은 물론, 각종 비상약, 곤충 기피제, 비를 피할 우비부터 뱀을 쫓는 막대기까지... 배낭에 넣고 다니는 물품만 나열해도 끝이 없겠네요. 이 일이 워낙 위험하다 보니, 저는 늘 두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섭니다. 고생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식물을 발견할 때면 매우 큰 성취감을 느껴요. 따듯하고 습기 가득한 숲에서 피어오르는 향기와 덩굴 숲을 지날 때의 설렘, 희귀 식물을 마주한 순간의 희열, 그리고 날것 그대로 생생히 살아있는 식물을 아끼죠. 대개 원원종은 우리가 꽃집에서 보는 식물과 달리 거대하거나, 반대로 왜소합니다. 다듬어진 모양은 아니지만, 그러한 식물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어요. 지난번 습지를 갔을 때는 일반적인 생육 조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매우 작고 희귀한 고사리를 찾아냈습니다. 수목원의 허가를 받아야 해서 채취할 수는 없었지만요. 그 대신 고사리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포자를 수집하고, 종이에 연필로 특징을 스케치한 후 여러 장의 사진을 남기고, GPS를 이용해 위치를 기록했습니다. 식물 연구소에도 자료를 공유했으니 이제 연구원들이 현장에 나와 연구를 진행하겠죠. 저는 식물 연구소와도 긴밀하게 협업합니다. 이 일은 단지 식물을 발견하고 채취하는 일이 아니라 보호하는 일과도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등록을 거친 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면, 식물이 자라나는 환경과 비슷한 생육 환경을 조성해 번식시켜요. 그리고 이것으로 다른 품종을 계발합니다. 원원종은 아무리 독특하다고 해도 대개는 일반 가정환경에서 자랄 수 없으니까요. 품종 계발은 비슷한 종의 식물을 접붙이거나 교배하고, 후보 식물의 유전자를 삽입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저 또한 개인 작업장에서 직접 품종을 개발하는데, 채취한 식물과 비슷한 종의 식물을 교배해 최대한 많은 변이가 일어나도록 합니다. 교배를 하면 원원종의 본모습을 떠올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변종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러 변종 중에서 독특한 조합의 식물을 고르죠. 꽃이나 줄기, 잎의 색과 형태는 첫인상을 결정하지만, 식물의 촉감도 중요합니다. 도드라진 잎맥이나, 벨벳 같은 잎의 질감은 참으로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무조건 특정한 속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 속성 간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잎이 거칠거나 가시가 있는 식물이라도 매력이 있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햇빛에 금방 시들거나 마르지는 않는지, 과습과 병충해에 취약하지는 않은지 시간을 두고 관찰합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지나치게 수명이 짧으면 안 되니까요. 저는 제가 찾고 계발한 식물에 저만의 애칭을 붙이는데요, 이번에는 무슨 이름을 지을지 벌써부터 설레는군요.
‘식물의 도안을 그리는 사람’
도안을 그리는 일은 제 직업이에요. 전 고전적인 사람이라 수작업으로 도안을 그려요. 마지막 단계에서만 스캐너나 사진기를 이용하는 정도고요… 오늘날 도안을 손수 그리는 일은 장인이 하는 일에 가까워졌어요. 각종 프로그램이 발달하면서 형상을 만드는 일에 대한 평가가 낮아지고 있지요… 미드저니나 달리와 같은 각종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금세 아름다운 도안을 흉내 내고, 그를 조금만 변환하면 누구나 도안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3D 프린터로 도안을 입체로 뽑을 수도 있고, 도안뿐 아니라 옷 자체도 한꺼번에 뽑아내는 시대인 걸요… 그렇지만 전 제가 그린 도안에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물과 제가 마주할 때의 미묘한 느낌과 같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칠 법한 것들 말이에요. 살갗을 스치는 마른 풀, 물을 주면 반응하는 잎사귀는 식물과 내가 직접 만나야지만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지요.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붓질, 모눈종이에 스케치를 옮기는 과정. 도드라지게 수를 놓을 곳을 표시하는 기호. 벽면에 붙여두거나 책상 한쪽에 쌓아둔 도안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린 도안은 옷감을 만드는 데 사용해요. 천이 대량으로 필요할 때는 공장에 넘기지만, 작은 크기의 천은 제 작업실에 있는 베틀로 직조하기도 하죠. 베틀을 쓰면 일반 천을 만들 때보다 오래 걸리기는 해도… 전 그런 게 좋아요. 어찌 보면 식물이 자라는 속도와 비슷하지요. 도안을 그릴 때 중요한 점은, 가로 세로로 넓혔을 때도 연속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아무리 멋진 도안이라도 이어지지 않으면 옷감으로 사용할 수 없어요. 단 하나의 옷을 위한 도안이 아닌 이상에는 말이에요. 그리고 도안의 느낌도 옷감에 따라 달라요. 같은 도안이 리넨과 면천에 그려졌다고 상상해 보세요. 직접 표면을 쓸어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올이 굵은 리넨이라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섬세하게 짜인 면천이라면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겠죠. 흥미로운 건 옷감만이 아니에요. 전 때로 직접 도안을 전사하는데 주로 택하는 방식은 판화예요. 도안을 판화로 찍으려면 색면을 나누고 칠하는 순서를 생각해야 해요. 어두운 톤과 밝은 톤, 그 외에 포인트가 되는 색깔들… 다양한 두께로 잉크를 쓰는데, 지나치게 두껍게 하면 내구성에 문제가 생기지만, 약간의 차이를 둔다면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죠. 몇 년 전부터는 줄곧 덩굴 식물을 그려왔는데요, 엉킨 식물을 하나씩 눈으로 풀어서 어디서부터 자란 건지 가늠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엉킨 느낌 그대로 그리기도 해요. 처음에는 식물을 하나씩 뜯어보며 관찰하거나,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그렸지만, 최근에는 식물의 색과 질감을 번안하고, 도안 자체의 조형성과 조형 요소의 배치를 중점적으로 고민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에는 종이의 사각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틀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쭉쭉 뻗어나가는 줄기와 여러 색이 혼합된 이파리를 생동감 있게 그리기는 힘들거든요. 갇히고 싶지 않아서 마음을 놓고 그리는 방식을 택한 거죠. 그리고 도안을 다 그린 후에는 그림의 섬세함이 도드라지도록 보드랍고 올이 가는 백색 면천에 뽑아낸답니다.
이 글은 임지현 작가의 개인전《Climber》(2023. 9. 6. ~ 24.)의 전시 안내서, 그리고 작가의 작품을 보고 쓴 소설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전시:《Climber》 임지현 개인전
공간: 상업화랑 을지로 (서울시 중구 을지로 143)
기간: 2023. 9. 6. ~ 24.
글: 윤형신
디자인: 김정활
설치: 전재원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