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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Nov 26. 2023

《실금 fine cracks, fine threads》

김승규, 박효범 2인전  전시 소개글 & 서문

김승규와 박효범의 2인전 《실금 fine cracks, fine threads》는 두 작가가 마주하는 여러 차원의 균열과, 그에 대응하는 언어를 엮는 기획이다. 김승규는 상대방이 이해하는지 알지 못한 채 내뱉는 독백에 자신의 그림을 빗댄다. 박효범은 이해 불가한 일, 말, 사물, 현상, 이름 등을 마주할 때의 중얼거림처럼 글을 짓는다. 그러나 작가들의 독백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으로 수렴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두 작가는 기획자의 제안에 따라 2023년 2월부터 예술적 교류를 이어왔다. 전시는 교류의 과정을 작품과 전자책의 형식으로 공유한다. 박효범은 김승규의 드로잉에서 출발해 글을 지었고, 김승규는 박효범의 글에 화답하여 그렸다. 이들의 작품은 서로를 만나 재맥락화된다. 두 사람의 작품이 들어가는 전자책은 전시 기간 업데이트되며, 이후에는 그림책으로 엮일 것이다. 서로의 작업을 해설할 생각도, 벌어진 균열을 속히 꿰맬 마음도 없는 두 작가의 독백을 엮고 포갤 때, 낱장 사이, 이미지와 이미지의 틈에서 촉발되는 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두 작가의 대화는, 대면은, 호흡은, 몸짓은, 입꼬리는, 목소리는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전시 소개글: 박효범, 윤형신






저는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당신은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 같았어요. 어쩌면 같은 출신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건 아무튼 상관없었지만요. 당신이 친구와 통화를 하는 걸 보고 나서야 한국어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당신께 저는 어디로 가고 있냐 물었습니다. 당신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요. 우연하게도 당신의 친구는 나와 같이 미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처음 본 당신과 한 번도 보지 못한 당신 친구를 찾아갔어요. 


당신의 친구는 그의 다른 친구와 2인전을 열고 있었습니다. 전시장은 작았어요. 마치 지금 제가 연 전시의 전시장처럼요. 전시장 한 편에는 일기장이 두 권 있었습니다. 두 권의 일기장은 서로 겹쳐진 채 한 권은 천장에, 다른 한 권은 바닥에 실로 매달려 있었죠. 그리고 일기장 옆의 모니터에는 페이지를 한 장씩 번갈아 넘기고 겹치는 두 사람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습니다. 두 책의 페이지를 한 장씩 겹치면 마찰력 때문에 풀 없이도 쉬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당신의 친구가 해주더군요. 


공간은 작았지만,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친구는 왼편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또 다른 친구는 오른편 공간에서 첼로 연주회를 며칠 전에 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제가 있었더라도 두 장소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었을 테지만, 두 사람의 존재를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으로, 벽면을 울리는 반사음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따로 떨어진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 소리. 혹은 음악. 서로 겹쳐 공중에 뜨는 일. 마찰력의 친밀감과 장력의 긴장감. 각자 느끼는 쓸쓸함과 공명하는 일. 당시에 저는 전시를 기획하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두 사람의 전시를 만든다면 그런 느낌이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저는 김승규와 박효범의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김승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때로 독백처럼 느껴진다고 해요. 무언가를 말하려 그리지만 상대가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한편, 박효범 작가는 이해가 불가하거나 불합리한 일, 말, 사물, 현상, 이름 등을 마주할 때 차곡차곡 쌓이는 속말처럼 작업을 한대요. 그 때문에 저는 두 사람의 작업이 보기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승규와 박효범은 고립된 개인의 내면에 대한 자신의 설명 이상을 원하는 듯 보였습니다. 본래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지만, 그때까지 서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이에 저는 두 사람에게 2인전을 열자고 제안했고, 이들은 올해 봄부터 예술적 교류를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전시에서 김승규 작가는 수년간 그린 드로잉을, 박효범 작가는 모아온 글의 필사본을 선보입니다. 그리고 교류의 결과물로써, 박효범 작가는 김승규 작가의 드로잉에서 출발해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거나, 김승규 작가의 드로잉에 등장하는 인물을 서술자로 삼는 글을 지었습니다. 한편, 김승규 작가의 기존 작품은 박효범 작가의 글을 만나 재맥락화되고, 김승규 작가는 박효범 작가의 글에 화답해 새롭게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만들게 된 전시의 제목은 ‘실금’입니다. 실금은 ‘실같이 가늘게 그은 금’, 혹은 ‘깨지거나 터져서 생긴 가는 금’입니다. 마치 실금과도 같이 날카로운 펜촉은 종이의 표면을 긁고, 잉크는 종이 속 깊숙이 스며듭니다. 그러니 드로잉과 필사본은 바탕의 표면을 얄팍하게 스치고 지나간 선이 아니겠지요. 김승규 작가의 드로잉은 때로 마음에서 터져 나온 것처럼 보이고, 박효범 작가의 필사본은 삭제된 언어처럼 지워지거나 묵혀둔 상처처럼 쓸린 채 존재합니다.  


‘실금’이라는 제목을 택한 이유가 또 하나 있어요. ‘실금’이라는 단어는 ‘실’과 ‘금’으로 나누어집니다. ‘실’은 드로잉이 지닌 이야기의 가닥, ‘좁은 공간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김승규 작가의 변명, 그리고 연결되지 않던 것들을 이어 세계를 이해할 지도를 구성하려는 박효범 작가의 시도를 닮았습니다. 또한 ‘금’은 깨질 듯한 불안정한 상태로, 김승규 작가가 작품에서 가늠하고 있는 나와 타인의 긴장감, 그리고 긁힌 마음만큼이나 깊어 보이는 박효범 작가의 필사본을 떠올리게 해요. 금은 원래 밖에서 가늠한 것 보다 깊게 나는 것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딱딱한 껍데기를 깨는 탄생 전의 상태를 의미하는 ‘금’은 다음의 독백 혹은 대화를 준비하려는 두 작가를 닮았습니다. 


저는 전시의 제목을 지으며 두 권의 일기장을 매달았던 실을 떠올렸습니다. 겉으로는 볼 수 없는 일기장 속 제본실과 세양사도요. 실은 내면의 비밀. 그리고 그와 등을 맞붙인 소통의 시도에 빗댈 수 있습니다. 금은 작가와 타인의 경계, 그리고 무언가의 시작과 닮았고요. 두 사람의 그림과 글을 엮는 일은 균열의 봉합이 아닌, 대화의 실마리를 창출하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전시가 두 사람의 독백을 엮어 제2의 발화로 이어지는 실, 그리고 관객이 이어가는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전자책의 형식으로 교류의 과정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친구가 쓴 것과 같은 일기장은 아니지만요. 두 사람의 작품이 수록된 전자책은 전시 기간에 업데이트되고, 전시 종료 후에는 그림책으로 엮어 볼 예정입니다. 전자책이 종이책으로 바뀌는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겠지요. 그림과 글로 전달할 수 있는 감성은 매우 미묘한 것이 되었지만, 그래서 도리어 그림과 글의 관계를 살피려 합니다. 전시장에 놓인 전자책은 그림과 어떤 관계를 지닐까요. 전자책은 전시장에 자리한 글과 그림의 동어 반복일까요. 오늘날 시적인 그림과 텍스트는 어떤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저와 당신, 그리고 당신의 친구는 맥주를 한잔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맥주 향은 다양했네요. 이제는 제가 갔던 전시 공간도, 당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을 간간이 떠올리는 동안 전염병이 전 세계에서 크게 돌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는 중입니다. 언뜻 보면 무탈해 보이는 이곳에서조차 사람들이 스러져 갔어요. 우연히 알게 된 당신이지만, 요행히 위험을 피하며 지내지 않길 바랍니다. 당연히 누려야 할 평온 속에서 잘 지내고 있길 바랍니다. 당신은 무탈히 지내고 계시는가요.  



서문: 윤형신






이 글은 김승규, 박효범 작가의 2인전《실금 fine cracks, fine threads》(2023. 10. 25. ~ 11. 12.)의 전시 소개글(박효범, 윤형신)과 서문(윤형신)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두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김승규, 박효범 2인전 《실금 fine cracks, fine threads》

일시: 2023. 10. 25.(수) ~ 2023. 11. 12.(일) 14:00 - 20:00, 월요일 휴관

장소: 위상공간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36 나길 3 1층) 휠체어 접근이 가능

기획, 디자인: 윤형신

사진: 최철림

운송: 백승규

도움: 정현, 김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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