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형신 Feb 26. 2024

EARWORM

고현아 개인전 《Earworm》(2024. 2. 21. ~ 3. 3.)

전시장에 들어온 초파리: 어느 틈에 어떤 공간으로 흘러 들어왔다. 앞선 인간의 뒤꽁무니를 쫓다 문이 열려 빨려 들어온 것이겠지. 조금 어둡다. 빛이 밝지 않아. 내게는 매우 큰 공간이다. 그리고 거대한 종이들. 멀리서 본 종이에는 온갖 무늬가 그려져 있다. 날개를 저어 종이 위에 앉는다. 가까이서 바라본 종이 표면은 산 같기도, 바위 같기도, 강물 같기도 하다. 발에 닿는 종이의 감촉은 꾸깃하고 질기다. 물든 두꺼운 종이가 무두질한 가죽 같다. 여섯 개의 다리로는 걸을 수 없는 너른 종이. 너른 종이. 종이. 종이. 종이. 종이에서 발을 떼고 공간을 탐색하기 위해  날개를 젓는다.  


기획자 Y: 그녀의 작품은 징그럽지만 아름다워. 징그럽지만 본능적으로 균형을 찾아가는 것 같단 말이지. 거대한 물고기의 등뼈를 통째로 소화하려는, 그보다 더 거대한 고래의 뜨거운 뱃속처럼 말이야. 일없이 움직이는 듯 보여도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벌의 무리라던가, 허물을 벗기 위해 나무 둥치를 오르는 매미 유충처럼, 종이를 구기고 물감을 바르는 그녀의 손은 때를 정확히 알고 화면으로 튀어 나와.  


전시장에 들어온 초파리: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 들어 온다. 최대한 멀리 떨어지자. 천장에 붙자. 이쯤이면 안전하겠지. 천장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종이 속 풍경처럼 뒤섞여 있다. 사물 사이를 배회하던 인간의 무리가 웅성거리기 시작해. 저들은 자신들이 내는 소리가 웅웅거린다는 걸 알까? 머리를 꽝꽝 울리다 못해 다리에 난 잔털까지 떨리게 하는 공격적인 소리라는 걸 알까? 


익명의 관객: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무언가 이명이 들려요. 사락사락거리는 소리.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내 발소리인가 해서 돌아보면 열린 창문에서 나온 빛 그림자뿐. 이건 어쩌면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일지도 몰라요. 매미 허물을 손에 쥘 때 바스러지는 소리나, 허물에서 빠져나온 매미가 우는 여름의 소리. 바싹 마른 목련의 겨울눈이 부서지는 소리나, 겨울눈이 작은 새로 변해 깃털을 푸드덕거리는 소리. 


창작자 K: “눈 앞에 펼쳐진 화면이 우거진 풀숲이 되거나 불꽃이 되는 날이 있다.”  


기획자 Y: 나는 말했다. 모든 사각과 귀퉁이를 없애자. 그녀는 말했다. 나는 종이에 펼쳐진 공간으로 뛰어 들어가. 그녀는 그림 속에 광활한 깊이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펼치기엔 사각의 틀은 작아서, 그림은 점점 커지고, 길어지고, 이어져. 그녀에게는 사각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해. 그녀가 자꾸 그림 속에서 나방을 꺼내는 건 그림을 확장하려는 이유일 거야. 미로 같은 이곳은 그녀의 머릿속을 빼닮은 공간일 거야. 그곳은 매일 같이 형상이  피어나고 스러지는 공간일 거야. 나는 그녀와 작업하지만, 어떤 것을 그녀가 머릿속에서 죽이고 살리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무심코 종이죽을 나방이라 부른다. 겉이 얽은 나방들은 서로의 날개를 비비며 인분을 턴다. 이들은 죽었지만 살아있고, 곧이어 달빛에 자신을 내던질 것만 같다.  


각주 1: 지도) 지구 표면의 상태를 일정한 비율로 줄여, 이를 약속된 기호로 평면에 나타낸 그림. 

각주 2: 미로) 어지럽게 갈래가 져서, 한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길.  


전시장에 들어온 초파리: 인간의 무리가 떠났다. 천장에서 내려와 하얀 사물 위에 살풋이 앉아 봐야지. 저기 저 동산 위에도 올라가 볼래. 첩첩이 쌓인 사물들은 미로 같아서 나의 작은 몸을 숨길 수도 있다. 하지만 되돌아 나오기에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먹을 것이 없는 이곳에서 다른 초파리를 만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기획자 Y: 처음 만났을 때도, 그다음의 전시에서도 나는 그녀를 화가로 알고 있었다. 화가와 조각가의 구분은 구식이긴 하지만 작가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을 짐작하는 데 꽤나 도움이 된다… 전 전시에서 그녀는 종이죽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였고, 그것을 말렸다가 자신의 그림에 남모르게 붙였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며칠이 지나 지킴이를 하러 온 이후. 돌기가 난 종이죽. 그러나 그것은 그림에서 떼어 내야 하는 이물로 보이지는 않았다. 모은 손에 담겨있는 듯한 그것은 털어내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거 혹시 바다딸기 아닌가요. 우리 이걸 바다딸기라고 불러요. 바다딸기는 내가 쓴 글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그녀가 동의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 계절이 두 번 지났고, 그녀는 종이죽으로 무언가를 잔뜩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업실에서 빼곡히 늘어선 종이죽 사이로 발디딜 틈을 찾는다. 재료가 종이만 아니었다면 수백 년 후에는 패총으로 발견될지도 몰라. 갑자기 그녀는 조각가가 되려는 것일까?  


익명의 관객: 봐요. 여기에 흰 조각들을 이렇게나 많이 쌓아 두었어. 그녀에게는 촉감이 매우 중요한가 봐요.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어딘가 직관적인 데가 있어요. 흰 곤충 모양에 새긴 자국들 하며, 동굴 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들조차도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놓여 있잖아요…  


기획자 Y: 담쟁이가 벽을 타듯 중력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얇게 편 종이죽을 높이 쌓고자 했다. 작업실을 방문할 때마다 종이죽 더미는 점점 더 높아져 간다. 아래쪽의 종이죽 두께는 나름 두껍게, 위쪽으로 올릴 것들의 두께는 더 얇게 조절하고 있지만 130호에 달하는 그림 높이에 비하면 아직은 돌담 정도의 높이다. 종이죽의 높이를 자꾸만 높이는 데는, 벽으로 그것들을 밀어 넣는 데는 그녀의 태도가 유의미하게 작동하는 듯하다. 종이죽에는 단면 색종이처럼 앞뒷면이 있고 대부분이 벽을 향해 등진다. 작가님. 종이죽은 부조보다는 그림이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림을 바닥에 눕혀 그린다면서요. 저번에 보여주신 사진처럼 종이죽 나방도 그림 속을 누빌 수는 없을까요.  


창작자 K: 중학교 1학년. 하복을 입고 학교를 가던 어느 여름날. 다리에 힘이 풀린 매미 한 마리가 나무에서 옷 속으로 툭 떨어졌다. 때는 여름의 끝물이었고, 매미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떨어진 매미는 소리를 질렀고, 나 또한 질겁해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하나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는 죽기 전까지 매미가 질렀던 울음과 그의 배가 만들어낸 진동. 어떻게 매미를 털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리는 털어낼 수 없어. 손에 잡히질 않으니. 이후로 여름이 되면 영락없이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매미의 울음인지 다른 매미의 울음인지 알 길은 없다.  


기획자 Y: 나는 질리지 않은 채 몇 년째 같은 노래를 듣는다. 듣다 보면 듣지 않는 순간에도 노래가 귓속에서 들린다. 뱉지 않은 노래는 입 안에서도 맴돈다. 그녀의 작업은 비유하자면 음악이나 노래라기 보다는 소리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화음이나, 눈물 짜내는 절절한 가요 말고.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리는 가지를 줍다가 들려온  풀벌레 소리. 종이가 구겨지고 바스락거리는 소리. 듣지 않아도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 누군가의 신호가 그녀의 진동수와 맞을 때의 공명. 찾아보니 자꾸만 귓전에 맴도는 곡조를 Earworm이라고 한다네. 귓속의 애벌레가 자라면 무엇이 될까. 그런 얘기 어렸을 때 들은 적 있어? 포도씨를 삼키면 뱃속에서 포도나무가 자란다는 말. 음습한 뱃속에 싹이 트면 목구멍으로 터져 나온다는 말. Earworm의 연관 검색어인 Corn earworm은 옥수수를 먹는 벌레인데 다 자라면 나방이 된다고 한다.




이 글은 고현아 작가의 개인전《Earworm》(2024. 2. 21. ~ 3. 3.)의 전시 서문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arworm

공간: '예술공간 의식주'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80 201호

기간: 2024. 2. 21. ~ 3. 3. (월, 화 휴무, 오후 1시 30분 - 6시 30분)

작가: 고현아

기획, 글: 윤형신

공간 지원, 글: 박소호

포스터 디자인: 김망고



작가의 이전글 「빙하–파도–강물–안개-구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