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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May 04. 2024

「그때-그곳으로부터 지금-이곳까지」

박윤지《10:05am : Ten O Five In The Morning》

   나는 처음 박윤지 작가의 그림을 접했을 때 일상성을 느꼈다. 누구나 한 번쯤 길을 가다 마주했을 정경. 빛과 그림자의 자연스러운 표현. 편안한 색채 표현은 그림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러나 박윤지 작가의 어떤 작품은 들여다볼수록 낯설다. 그의 그림 몇몇은 사실적이지만 초현실적인 면모를 숨기고 있다. 우선 이번에 전시된 작품 〈머문 자리〉(2024, 장지에 채색, 130x130cm)를 보도록 하자. 그림 속 하얀 벽에는 청록색 나무 그림자가 흩뿌려져 있고, 하얀 벽의 왼편 혹은 뒤편에는 녹색의 단풍나무 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한데, 방금 내가 벽이라 칭한 흰 사각형은 진정 벽일까.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각도로 계산하건대, 그것이 벽이라면 그림자는 이런 형태로 드리워질 수 없다. 벽이 종잇장만큼 얇지 않은 한, 단풍나무 또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흰 사각형의 바깥, 즉 그림의 왼쪽 아래 모서리에 남은 면적은 대각으로 분할되어 있다. 하면, 사각형은 시야를 가로막는 하나의 벽이 아닌, 벽 세 개가 모여 만든 음의 공간-모서리일까. 그러나 다시금 왼편의 단풍나무를 본다면 그럴 수는 없다.


   이번에 전시되지는 않았으나, 동명의 2022년 작 〈머문 자리〉(장지에 채색, 130x130cm) 또한 낯선 장소에 온 것과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구조의 건물과 땅. 화판의 수직 수평을 따라 화면을 분할하는 건물의 틀. 벽인지 유리창인지 모를 색면. 생경함을 자아내는 푸른 색. 갑작스레 끊어진 선명한 그림자와 연기처럼 피어오른 옅은 그림자. 이 모든 것이 모여 초현실적인 화면을 만든다.


   위에서 서술한 불가능한 사물의 배치는 작가의 의도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가 건물을 그리는 법은 화판의 그리드를 따른 조형 방식이자, 동아시아의 전통 회화에서 사용되었던 입체의 표현 방식이다. 장지 자체로 비워 두거나 호분으로 희게 칠한 그림의 외곽은 화판의 수직과 수평을 따르고, 때로는 창틀을 이루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지체와 물감의 물성을 드러낸다. 그에 반해 사물의 그림자는 원근에 따라 빽빽하고 성기게, 진하고 옅게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박윤지 작가는 이렇듯 구성과 재현을 오간다.


   여기서 잠시 그가 포착한 것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변화하기에 진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빛과 그림자는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소재에서 소외되어 왔다. 그러나 박윤지 작가는 전통을 위시하는 동양화과에서 작업을 시작했음에도 이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에게 빛과 그림자는 매일 같이 다른 것으로, 변치 않는 것은 없다는 세계의 법칙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그가 포착한 일상의 일면은 진실을 가리킨다. 이렇듯 관점은 옛사람들과 달라졌으나, 작가는 동양화과에서 수학하며 자신에게 친숙해진 전통 재료를 다룬다. 이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캔버스에 물감의 덩어리를 쌓아 올린 것과는 다른 방식의 그림자 표현이 나타나게 된다. 닥나무의 장섬유로 만든 순지를 겹쳐 제작한 장지는 닥 섬유 사이로 물감을 흡수하고, 안료를 머금은 채 평평한 화면으로 남는다. 장지에 물을 분무하고 수성 물감을 여러 차례 스며들게 하는 작업은 그림자의 톤 변화를 자연스럽게 한다. 물감이 종이에 스미는 방식은 빛이 공간에 스미는 방식과 닮았기에 더욱더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따라서 이러한 기법으로 완성된 〈Window〉(2024, 장지에 채색, 72.7x60.6cm, 3점) 연작은 현실의 풍경처럼 보인다. 하나 여기에도 2024년과 2022년의 〈머문 자리〉 연작과는 다르지만 그림을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가 있다. 먼저 유리창은 화판 전면을 채운다.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reflection)와 커튼에 드리워진 나무의 그림자(shadow), 창에 반사된 외광과 실내에서 빛을 뿜는 조명이 뒤섞인다. 이 같은 이미지들은 광학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다르다. 빅토르 I. 스토이치타에 따르면, “그림자는 ‘다른’ 단계를 재현하는 반면, 거울은 ‘동일한’ 단계를 재현”한다. [i] 작가의 창문은 그에 비친 그림자와 드리워진 그림자로 인해 한 방향으로 무한히 뚫린 창문이 아니게 된다그 때문에 나는 작가가 있었을 시공을 상상하고그가 발견했을 이미지의 층을 파악하려 시도하게 된다


   박윤지 작가의 그림은 내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시도하도록 한다. 초현실적인 화면은 어디에도 없을 법한 시간과 장소를 소환하여 기묘함을 느끼게 하고, 그림이 그림임을 알게 하고, 그림을 보는 순간을 인지하도록 한다. 그림을 확장한 세계에 내가 있다면, 나는 어디에, 어디쯤에 있는가. 나는 밖에서 나무를 등진 채 실내를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림자는 나의 어깨에, 등 뒤에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반대로 나는 방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이다. 빛은 사물의 주변을 지나쳐 이리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것 안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가 포착한 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고, 어딘가에 비치거나 드리워진 그림자 또한 그때-그곳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을 마주하고 있는 나는 어디에, 어디쯤에 서있는가를 자꾸만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i] 빅토르 I. 스토이치타, 『그림자의 짧은 역사』, 2006, 이윤희 역, 현실문화연구, p. 49.






작가 소개


   박윤지(b. 1990) 작가는 빛과 그림자의 일시성, 순간성에 관심을 두고 감성을 부여한 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는 2020년의 개인전 《At the Corner》(룬트갤러리, 서울)에서 변형 화판을 사용해 조형 실험을 했으며, 두세 개의 화판을 연결하여 설치함으로써 건물의 모서리에 드리워진 빛을 재현한 바 있다. 같은 해 열린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석파정서울미술관, 서울)에서는 닥나무를 원료로 한 순지의 물성을 적극 활용하여 종이에 물 자국을 남긴 독특한 표면을 만들었다. 다음 해에는 개인전 《날과 날》(2021, 우민아트센터 프로젝트스페이스 우민, 청주)을 열어 창문을 연상케 하는 정사각형의 화면에 변화하는 빛을 담았고, 2022년 《머문 자리》(아트지지갤러리, 분당)에서는 사실성과 초현실성이 공존하는 대작과 기하학적 색면으로 빛과 그림자를 추상화한 소품을 전시했다. 


   추상화된 조형 요소와 사실적 표현 간의 긴장,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감성과 초현실적 구성 간의 충돌은 박윤지 작가의 작업 전반에 드러나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순지와 장지, 수성 튜브 물감과 분채는 작업에 있어 표현에 중요한 요소다. 작가는 재료에 있어 초기에 얇은 순지를 사용해 은은하고 맑은 색감과 자연스러운 번짐과 물 자국 표현을 보여주었고, 차차 두터운 장지에 분채 물감을 중첩하여 깊이 있고 진한 색감을 표현해 왔다. 소재의 측면에서는 사물이 빛을 가려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shadow)를 탐구하는 데서, 그림자와 사물이 창에 비쳐 생기는 그림자(reflection)가 중첩되는 복잡한 레이어를 지닌 그림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 《10:05am : Ten O Five In The Morning》은 작가의 신작에 드러난 작업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자가 화면 전체를 채워 한 폭의 추상화처럼 보이는 작업, 기하학적인 조형 요소와 그림자가 공존하는 작업, 초현실적인 풍경을 그린 작업, 여러 층위의 그림자가 중첩된 작업, 옅은 색조로 빛의 분위기를 묘사한 작업 등이다. 푸른색, 청록색, 녹색처럼 전반적으로 시원한 색조를 띤 그림들은 장지에 분채를 사용해 만들어졌다. 다양한 시간대와 감성을 담은 그림들이 모였으나, 이번 전시는 《10:05am : Ten O Five In The Morning》라는 제목으로써 다음 발을 내딛으려 하는 신진 작가의 출발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오전 10시 5분이라는 시간은 박윤지 작가가 작업실에서 작업 도구를 갈무리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하루의 출발이자, 햇살이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는 시간을 뜻한다.   






제목 : 《10:05am : Ten O Five In The Morning》

기간 : 2024. 05. 10.(금) - 2024. 06. 08.(토)

작가 : 박윤지 @parkyunji._

기획 및 운영 : 갤러리 플레이리스트 @galleryplaylist

서문 : 윤형신 @guat1s2178

전경 촬영: 양이언 @photolabor_

영상 촬영: 임규영 @doyosay_studio

장소 :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138번길 3,갤러리플레이리스트

운영 일시 : 수요일 - 토요일 11:00 - 18:00 (공휴일 및 일-화 휴관)


이 글은 박윤지 작가의 개인전 《10:05am : Ten O Five In The Morning》(2024. 05. 10. ~ 2024. 06. 08.)를 위해 쓰인 비평과 작가 소개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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