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가 끝나고 난 뒤~
세입자의 관점에서
“이걸 다 치우고 가야지, 어떡해.”
“저희 아직 안 갔잖아요, 이모님.”
10년 동안 살았는데도 떠나는 사람보다는 창틀의 보전을 신경 쓰는 주인집 아주머니의 모습에 역시나 집주인은 집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4일간 열린 전시의 마지막 날 현관에 모여든 관객을 보고 아주머니는 헛기침을 했다. “흠! 흠, 흠!” 나는 헛기침이 이 모든 소동을 벌인 나를 찾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굳이 나가서 뒤늦게나마 전시를 허락받거나 몇 시간 후면 다시 원상태로 복귀될 터이니 안심하라는 해명을 하지 않았다. (전시가 열리기 전 내가 드린 설명은 이사 이전에 친구들과 파티를 열 예정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때문인지 전시가 끝나고 청소를 하는 와중에 찾아온 아주머니는 깨끗이 하라는 말 외에는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파티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일체 궁금해하지 않았다.
집주인 아주머니와 나는 데면데면하다거나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는 편이었다. 아주머니는 종종 직접 만든 음식이나 뒤뜰에서 키운 채소를 나누어 주었으며, 나는 추석이나 설날, 집주인 아저씨의 기일에 과일 박스를 가져다드렸다. 10년 전 아주머니는 아들의 장가를 걱정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새로이 태어난 손자가 얼마나 똑똑하고 귀엽게 구는지 자랑했다. 내가 아팠을 때 아주머니는 병원에 딸기 한 바구니를 들고 찾아왔고, 며느리가 아팠을 적에 나는 위로의 의미로 아주머니를 안아주었다. 4일 전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이삿짐을 옮기는 나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만큼 아주머니와 나는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이해관계는 보이지 않는 선이었다. 우리는 꽤나 주고받음이 명확한 관계에서 살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무언가를 가져다줄 때에 맞추어 먹을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 외에는 같은 집의 다른 층에 살고 있음에도 몇 달에 한 번 마주치면 많이 본 편이었다. 홍대와 신촌 사이의 쓰리 룸이니 비교적 집세가 싼 편이었지만, 아주머니는 몇 년에 한 번씩은 집세를 올렸고, 돈을 더 내라는 말을 대놓고 하기 민망했던 것인지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아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나를 예뻐했던 이유 중 많은 지분은 부모님의 재정 상황이 안정적이라는 점, 그 때문에 집세를 늦지 않고 낸다는 점과 “얌전해서” 집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세입자라는 사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같은 집에 살아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와 줄 사람이기도 했다.
기존 월세방의 청소와 돈 계산을 마치고 밤늦게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새 집에 도착했지만 월세방을 치우느라 들이마신 먼지 때문에 자꾸만 기침이 났다. 아주머니는 비교적 좋은 집주인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거리감을 느끼는 까닭은 거둔 은혜를 모르는 검은 머리 짐승이기 때문인 걸까. 나 또한 이번 전시에서 아주머니를 전시의 관객으로 초대하기보다 미술이라는 장벽을 세우고 젊은이의 개인주의적 태도로 그를 대하지 않았는가.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집주인과 세입자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된다. 아니, 집주인과 세입자였더라도 갑과 을의 자리에 놓여있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건물주의 권세가 하늘과 같은 한국에서 그러한 바람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터였다. 이건 아주머니와 나의 인간성이 별로였다거나, 개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반대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미시적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아주머니의 을인 나는 누군가의 갑은 아니었을까. 전시를 마치고 철수 예정 시간을 넘겨 작품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한 작가님은 자꾸만 내 눈치를 보았다. 편하게 공간을 이용하라는 말에도, 그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공간을 운용하는 나, 그리고 그 공간의 소유자인 집주인을 의식해서 였으리라. 작가가 〈이사 비닐 위에 전시 공간 짓기〉라는 워크숍을 진행한 의도는 자유롭게 자신만의 공간을 상상하기 위함이었고, 워크숍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워크숍 진행 중에도 종료 이후에도, 작가와 나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했다. 공간이 아무리 공공성을 지향하더라도 공간을 차지한 사람은 결국 누군가의 갑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마포구의 한 공간을 잠시나마 공유한 우리, 그리고 2025년 서울의 세입자와 예술가들이 처한 공통의 상황이었다.
기획자의 관점에서
오늘날의 한국에서 개인의 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유가 아니라 월세/전세를 내고 일정 기간 머무르도록 허가되는 공간이다. 전시장 또한 실사용자의 소유인 경우는 드물지만, 사람이 사는데 필수적인 거주지의 경우 부동산 소유자와 세입자의 계급 차는 더욱 극명하게 와닿을 것이다. 특히나 서울의 경우 주거에 사용되는 비용이 생활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집 외부의 풍요로운 인프라를 누릴 수는 있지만 내부에서 해결하면 좋을 많은 부분을 외부 공간에 위탁해야만 한다. 이번 전시의 협력자 윤형신은 집이 아닌 다른 곳, 즉 음식점이나 카페, 작업실에 추가로 돈을 내는 생활이 버거워 보다 넓은 공간에서 살 수 있는 경기도로 생활 환경을 이전하게 되었다. (‘서울로부터 밀려났다’고 표현하면 서울 중심 주의+과장된 자기 연민이겠고, 반(半) 자발적인 이주라 칭하는 것이 옳겠다.)
윤형신이 10년 동안 거주하던 서울의 한 자취방에서 열리는 《이사전》은 함께 살던 김망고의 기획으로 시작된 게릴라 전시다. (김망고 또한 몇 년 전 다른 작가가 기획한 게릴라 전시로 데뷔한 바 있다.) 윤형신은 자취방을 가득 채운 무거운 짐에 치여, 같이 사는 김망고에게 휴가를 내서 새 집에서 이삿짐을 정리하자고 말했으나, 김망고는 ‘언제 또 서울에서 전시를 열겠냐’며 기존 공간이 빈 4일 동안 ‘이사 전시’를 열자고 했다. 그렇게 2025년 7월 28일부터 31일까지 열리게 된 《이사전》은 집이라는 시공간의 임시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만들어졌다. (《이사前/展》이라는 한자가 붙은 제목은 윤형신이 전시를 갈무리하며 이사의 이전, 그리고 이사를 통한 전시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렇게 윤형신과 김망고가 월세를 내고 임대하기로 한 사적인 공간은 일시적으로 비어 작가와 관객을 환대하는 공공의 공간이 되었다.
즉흥적인 기획과 짧은 전시 기간에 따라, 김망고와 윤형신은 전시 오픈 직전 4일 동안 SNS에 참여를 독려하는 홍보글을 올려 전시의 참여자를 모집했다. 보여 주고 싶은 작업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 외에 참여 작가와 출품작은 별다른 선정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여기에 권동기, 김다슬, 김서연, 김서현우, 박지영, 박효범, 소쇄, 윤선우, 이십칠, 이유경, 임종연, 임태엽, 조홍신, 진강, 최현희, STEAK FILM 등 16명의 작가가 공개 모집에 응했다.
공간의 가소성과 닮은 꼴로, 설치와 철수 일정은 작가의 편의에 따라 정해졌다. 작품 배치는 먼저 도착한 작가와 나중에 온 작가가 협의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도착 순서에 따라 기존 공간을 점유하여 이루어졌다. 작가들마다 각기 설치와 철수 시간이 달라 참여 작가들의 모든 작품이 일시에 모인 기간은 단 몇 분도 되지 않았다. 두 기획자는 일시적으로 모인 작품과 방금 철수를 마치고 사라진 작업, 그리고 곧이어 모일 작업들을 상상하며 전시를 그려나갔다. 관람객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것이 전체의 총합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보아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임시성을 띠던 집은 작가와 작품, 관람객이 일순간 모였다 흩어지는 전시장이 되었다. (그렇게 테이프와 꼬꼬핀, 껌딱으로만 설치한 전시가 만들어졌다.)
흥미롭게도, 두서없이 모인 작가들의 작품은 전시장에 모이며 몇 가지 흐름을 만들어 냈다. 이는 서로 연관 없는 것들이 공존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관계성이 생기는 전시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시대상에 대한 공통된 감정, 이사 전에 만들어진 임시적 공간에 대한 작가들의 해석, 그리고 개성을 지닌 작품들을 연결 짓는 기획자의 즉각적인 중재로 발생한 것이다. 작가들의 주제들을 정리하면, 기존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퀴어 정체성의 표현, 물질성을 초월한 새로운 몸에 대한 관심, 미묘한 인간관계와 사랑의 감정, 회화 매체에 대한 탐구, 불안 속에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같은 관심사는 작가별로 철저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한 작가에게 동시에 나타나며 동시대 청년 작가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작업이 모인 순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홍대입구역 또는 신촌역 7번 출구에서 나와 7월의 뙤약볕에 땀을 뻘뻘 흘리며 와우산 쪽으로 10여 분 정도를 걸으면 레드판다하우스의 간판이 나온다. (레드판다하우스는 집을 임대한 다른 사업자가 외국인을 위한 일종의 에어비앤비를 운영하기 위해 달아놓은 간판이다. 참고로 기획자들이 거주하던 방도 곧이어 보다 많은 수익을 내는 에어비앤비가 차지할 것으로 되어있다.) 초록색 페인트가 두껍게 칠해진 대문에는 포스터라고 부르기에는 소박한, A4용지로 뽑은 《이사전》의 홍보물이 붙어 있다. 열린 대문으로 들어가 두 번째 문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면 《이사전》이 열리는 공간에 이른다.
몇십 년 전에 지어졌을 붉은 벽돌집 외부에는 조홍신의 〈벽과 벽 사이에〉(2025)가 붙어있다. 벽돌을 그린 〈벽과 벽 사이에〉는 붉은 벽돌집의 표면,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두기 위해 괴어 둔 붉은 벽돌의 물질성과 맞물리며 전시의 요소가 된다. 흰색 타일로 이루어진 현관에는 소쇄가 하나하나 손으로 접은 종이 별이 뿌려졌다. 관람객은 종이 별이 작품인지, 그저 현관을 장식하는 요소인지 알지 못한 채 그것을 밟으며 현관에 들어서야만 한다. 소쇄는 상처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는데, 관객이 밟고 갈 수 있는 별은 타인이 무심코 지르밟는 상처를 의미한다. 현관 오른편, 집 내부에는 두꺼비집과 조홍신의 〈인터폰〉(2025)이 병치되었다. 〈인터폰〉은 회화적 붓질로 이루어져 매끈한 실제 사물들과 충돌하는 효과를 창출해 낸다.
한편 왼쪽 화장실에서 붉은빛과 노랫소리가 복도에까지 새어 나온다. STEAK FILM의 영상 설치 작업인 〈폭군의 관리인: 훈중년바텀알바 연대기〉(2024)다. 작업 제목은 가수 Nico의 ‘Janitor of Lunacy(광기의 관리인)’이라는 노래에서 따온 것으로, ‘폭군의 관리인’은 각자의 배덕감을 고할 수 있는 일종의 악마와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작가는 평범한 가정집의 화장실에 붉은 조명을 설치하고, 뒤집어진 별 모양의 기호를 그림으로써 악마, 즉 자신의 페르소나를 소환하는 위반의 공간으로 전환한다. 작가는 비속어와 밈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통해 자조적이고 자기 풍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자조와 불안에 그치지 않고, 계엄령과 기후 위기 등으로 불안한 오늘날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말라’는 메시지를 넣는 등 대응 방안으로서의 자기애 혹은 자존감을 말한다.
화장실 옆방의 문에는 이십칠의 그림인 〈world except me〉(2025)가 있다. 집으로 배송된 택배 박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공간이라고 여긴 작가는 박스를 펼치고 잡지에서 찢은 풍경 사진들을 붙여 영혼을 형상화한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이십칠은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작업에 반영하며, 낡은 것이 소멸되고 새로운 것이 형성되는 일본 애니의 세카이계 세계관을 빌려와 퀴어의 영혼이 온전히 자리할 가능성으로 가득 찬 순간을 꿈꾼다. 이어 〈world except me〉의 오른쪽, 부엌 공간의 붙박이장에는 인체를 찍은 김서현우의 사진이 설치되었다. 몸의 이미지는 금세 여성 혹은 남성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회 통념에 함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김서현우는 몸을 사진 찍고 일부를 지워 기존의 관념으로 포섭되지 않는 새로운 몸을 창출한다.
김서현우의 작업 아래, 물때가 낀 싱크대에는 ‘girl/black hair/brown eyes/tall/intellect’라고 쓰인 임태엽의 입체 작업 〈오 나의 피앙세!〉(2023)가 있다. 전쟁터로 떠나간 이의 것일 법한 로켓, 즉 사진 등을 넣어 목에 걸 수 있는 장신구는 피앙세의 특징을 몇 가지의 명령어로 기록하여 가장 진실에 가까운, 살아 움직이는 연인의 현재 모습을 상상할 여지를 만든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은 인간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오랜 시간 살아남는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물에 씻겨나갈 듯한 물감처럼 보이는, 무광 유약이 발린 도자기는 싱크대와 결합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싱크대 옆의 냉장고 위에는 역시 임태엽의 작업인 〈좌표 오류의 욕망〉(2023)이 놓여있다. 오래된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은 두 사람이 상대의 몸에 그려진 타투를 번갈아 각각 사과와 소시지에 그린 후 먹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상에서 들려오는 성적 비속어나 사랑스러운 애인을 깨물고 싶다고 느끼는 감정처럼, 성욕과 식욕은 서로에 자주 빗대어진다. 영상은 성욕이 식욕으로 전이된 상황을 보여주며, 육신을 대체할 또 다른 몸을 상기한다. 그 아래 냉장고 내부 공간에는 흰색 플라스틱 조각으로 이루어진 김다슬의 〈허공, 붙잡기, 놓아버리기〉(2025)가 있다. 조각들은 일상 사진을 데이터로 변환하여 3D 프린터로 뽑아낸 것이지만, 그로부터 사진 속 본래의 일상을 소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품들은 냉장고 안에 자리함으로써 얼음과 같은 물질을 연상케 하며 일상의 공간을 재인식하도록 한다. 한편 쉽게 지나치기 쉬운 싱크대 서랍 속에는 최현희의 〈mini book〉(2024)이 들어있다. 관객이 들고 넘겨볼 수 있도록 제작된 책은 레진과 우레탄폼, 비단과 같은 반투명한 물질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경험을 거쳐 비물질을 상상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각기 다른 물질의 물성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비물질을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고자 한다.
임태엽의 작업 뒤편과 부엌 찬장 안에는 진강의 그림이 걸려있다. 진강은 이번 전시에서 자신이 자신에게 익숙한 도구인 종이와 먹, 물과 붓을 바탕으로 다양한 기법을 통해 금속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냈다. 종이에 수묵은 금속성을 표현하기에 불편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작가는 재료의 한계를 쉽사리 단정하지 않고 탐구를 지속한다. 부엌을 지나 공간의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기름종이를 붙여 미세하게 조절된 형광등 불빛 아래 회화 매체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는 임종연과 조홍신의 작업이 있다. 임종연은 눈사람을 그림으로써, 자신과 유사한 형상을 만들고자 하는 인간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원초적 욕망을 동시에 논한다. 나와 닮은 존재를 만들려는 행위와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는 형상에 자신을 투사하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흔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금세 녹아 없어질 눈사람을 그려 남김으로써 인간의 유한성과 그를 거부하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조홍신은 한편 전봇대를 반복하여 그림으로써 보다 발전한 회화적 표현을 모색한다. 그가 이미지를 여러 번 반복하여 그리는 까닭은, 임종연의 작업에서 보았듯 자신의 흔적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욕망에 기인했을 터이다.
부엌 반대편에 자리한 방은 가장 작가가 많이 모인 공간으로, 임태엽과 박효범, 윤선우, 김서연, 진강, 소쇄, 이유경이 참여했다. 임태엽은 〈디지털 납골당〉(2023)을 통해 디지털이 물질계를 장악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애도를 상상한다. 부엌에 설치한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납골당〉은 몸이 물질계를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박효범의 〈100,000,000,000,000,000,000편의 얼굴_1, 인천부터〉는 작가의 활동 기반인 인천에서 발견한 얼굴과 그에 관한 글을 파쇄하여 재조합한 책이다. 파쇄된 책장들은 수만 가지를 넘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얼굴들을 만들어 낸다. 원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얼굴들은 작가가 인천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느낀 생경함과 이인감을 반영한 듯하다. 관객은 작가조차 전부 파악할 수 없는 1 해 가지의 조합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나 책의 앞에서부터 한 페이지씩 넘기며 읽으면 그의 의도가 단순히 이미지와 글을 뒤섞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작업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폭력으로 가득한 세계를 능동적으로 읽어나가도록 요청한다. 수많은 조합 중 한 페이지를 온전하게 복원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자유공원 꼭대기의 맥아더상은 김경승이 만들었다. 반공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동상을 세상에 선보인 그 조각가는 생전 참 많은 얼굴을 만들었다. 이순신상, 전봉준상, 이승만상도 김경승이 만들었다고 한다. 4월 학생 혁명 기념탑까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인물 선정 기준이 일관성이 없고 엉망임을 재차 강조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얼굴에 둘러싸인 조각가를 상상해볼 뿐이다. 한 쪽 귀로는 혁명의 구호를, 다른 귀로는 민가 폭격을 명령하는 장교의 목소리를 듣는, 기념비 사이에서 늙어가는 삶을.”
박효범의 책 옆에 있는 윤선우의 〈The World Card-forward〉와 〈The World Card-backward〉는 타로카드와 마찬가지로 쌍으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작가는 바로 놓여 완전한 세계와 거꾸로 놓여 불완전한 세계를 의미하는 타로카드 21번 세계를 차용해 그림을 그렸다. 두 폭에는 모두 퀴어의 신체가 그려져 있고 얼굴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온다. 얼굴이 비어있기에 몸은 누구의 것도 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는 뒤집어진 신체 이미지를 통해 타인의 온전함을 논할 권리를 가진 자는 없다고 말한다.
같은 방에는 김서연의 〈Golden Hour, Nuance 1〉(2024)이 걸렸다. 작가의 그림에서는 작은 존재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김서연은 페이지가 겹쳐진 두 책과 같이 미묘한 감정선을 은유하는 사물을 등장시킨다. 대상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은은한 톤, 사려 깊은 붓질이 공명하며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 낸다. 그의 옆에서는 진강의 그림 또한 형식보다 내용에 초점을 두고 감상하게 된다. 금속성의 하트를 연결한 고리, 그리고 하트를 소중하게 받든 손은 사랑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방 한쪽에는 소쇄의 〈can not stand〉(2025) 연작을 걸었다. 소쇄는 사랑과 관계를 주제로, 애정하는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를 형상화한다. 속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천과 그림을 감싼 붕대는 각각 인간의 연약함과 치유의 시도를 상징한다. 이유경 또한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글에서 논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사회적 처지를 되돌아본다. 그는 미국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자신이 있을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분투 중이다.
가장 안쪽 방에서 박지영은 〈이사 비닐 위에 전시 공간 짓기〉라는 제목으로, 관객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워크숍의 결과물을 설치한다. 작가는 이번 워크숍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일시적으로 집을 비우게 된 두 기획자의 상황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진행했다. 이사는 공간을 비우는 행위지만, 그는 빈 공간을 이용해 다시금 가상의 공간을 구축하고자 한다. 거기에 더해 작가는 관객이 오가는 바닥에 종이와 먹지를 깔고 관객의 발자국과 장판의 무늬를 수집한다. 일시적으로 형성된 유토피아, 즉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을 기록하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지점이다.
빨랫줄을 따라 늘어선 박지영의 작업 옆으로 최현희의 그림 〈방향 레이어 실험 1, 2〉가 이어진다. 최현희는 바람의 이동 경로를 화살표 형태의 조각들로 나타내며, 비물질적인 것의 표현 방식을 상상한다. 같은 방에는 이십칠의 〈world except me〉이 2024년의 버전으로 걸려있는데, 불가해한 세계를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최현희의 작업과 이어진다. 세카이계는 세계가 무너지는 아포칼립스적 순간이지만, 존재가 새롭게 형성될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이십칠에게는 유토피아로 작동한다. 끝으로 권동기는 가장 마지막으로 전시장에 도착했기에, 그의 그림은 다른 작품들이 빠져나간 벽면에 자리하게 되었으며 전경 사진에도 포착되지 못했다. 그의 작업이 전시된 시간은 약 6시간 남짓이었다. 권동기의 그림은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한다. 그림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나비는 반쯤 물에 잠겨있고 수면 아래에는 물고기들이 위협하듯 헤엄친다. 그러나 작가가 중요성을 부여한 부분은 나비가 수면 위를 향한다는 점일 것이다.
글: 윤형신
<이사전>
작가: 권동기, 김다슬, 김서연, 김서현우, 박지영, 박효범, 소쇄, 윤선우, 이십칠, 이유경, 임종연, 임태엽, 조홍신, 진강, 최현희, STEAK FILM
기간: 2025년 7월 28일(월)~31일(목)
장소: 레드판다하우스 지하 102호 (서울 마포구 서강로9길 44)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10시 (31일 오전 10시~오후 6시)
기획: 김망고 / 협력 및 글: 윤형신 / 사진: 최철림
*주의: 게릴라 전시 특성상 전시 기간 중 작품이 설치되고 철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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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사전》(2025. 7. 28.~31.)을 위해 쓰인 전시 서문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