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명의 작가
권동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조화롭거나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현실은 모순의 집합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이상에 도달하는 꿈은 산산이 무산된다. 작가는 꿈이 무산되는 이유를 인간의 나약함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에 숨겨진 모순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에조차 오류가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할까. 권동기는 절망 대신 그를 지향하는 존재들의 존엄성에 주목한다.
김다슬
일상 사진에서 색 공간 데이터를 추출한 후 3차원의 형상으로 변환한다. 3D 프린터로 뽑아낸 흰 조각에서 바로 일상의 정경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각들은 냉장고에 자리함으로써 얼음이나 밥풀 같은 일상 속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이것들은 금방이라도 녹거나 변질될 것처럼 보인다. 일상은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가지만, 김다슬은 일상의 잔여물을 재차 부여잡음으로써 사라진 것들을 환기하고자 한다.
김서연
두 권의 책이 서로를 마주 본다. 아니, 서로를 안는다. 두 권의 책이 억지로 묶이거나 붙지 않고, 서로를 안는 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인내의 손길만이 그 시간을 알았을 테다.
김서현우
몸을 사진 찍고 그를 다시금 지운다. 그러나 지우기란 나머지를 남기는 행위,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진 속 몸은 지우는 행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김서현우는 기존의 시선에 포섭되는 몸과 기존의 몸을 포섭하는 시선을 벗어나, 새로운 몸을 만들고 주변의 편견에 도전하고자 한다.
박지영
박지영은 이사로 빈집에서 관객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전시 공간을 짓고자 한다. 기획자가 스무 명인 전시 공간, 가벼운 작품만을 전시할 수 있는 전시 공간 등이 그 예다. 이사에 쓰이고 버려지는 비닐은 작가와 관객이 드로잉과 함께 상상을 펼칠 일시적 장이 된다. 작가는 관객의 요구와 제안에 상호작용하며, 미술과 미술관을 이루는 조건들을 되짚어 본다. 관객은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각자의 상상을 구체화하며 공동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
박효범
박효범은 인천에서 발굴했거나 그와 관련된 얼굴들을 수집하며, 역사를 이루는 개인들을 추적하고 역사적 진실을 탐구한다. 그러나 작가가 책의 형태로 모은 얼굴들은 길게 파쇄되고 재조합되며 목적이 불분명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이미지로부터 작가가 추적한 인천의 역사를 읽어내기란 거의 무한대의 가능성만큼이나 요원해 보인다. 어쩌면 작가는 관객에게 작가만큼의 집요함을 통해 진실을 바로 보기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소쇄
우리는 타인의 상처를 바닥에 뿌려진 별처럼 사뿐히 지르밟는다. 상처는 소쇄의 반복되는 작업 주제다. <can not stand>에서 재봉 바늘의 궤적은 도드라진 자수로 남는다. 그러나 바늘의 흔적은 표면에만 남아있을까. 자수를 하면 천의 전면에 드러난 것만큼이나 많은 실이 천의 뒷면에 축적된다. 천은 부푼 표면만큼이나 깊은 내상을 입는다. 우리가 자수를 ‘새긴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수를 새긴 천은 다시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윤선우
작가에 따르면 타로카드 21번 세계는 완전함을, 거꾸로 뒤집어진 카드는 불완전함을 뜻한다. 그러나 타로카드를 본떠 두 폭으로 그린 그림은 어느 쪽이 완전함이고 불완전함인지를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윤선우는 어느 한 쪽을 완전함으로 상정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지만 오늘날에도 트랜스젠더를 완전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완전함을 논할 자는 과연 누가 될 수 있는가. 얼굴에서 빛을 뿜는 이들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으며, 강력한 권능을 가진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십칠
만화와 애니의 세카이계를 해석해 표현한다. 세카이계란 한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이루어지는, 소멸과 탄생의 순간을 다루는 장르물을 의미한다. 이십칠은 이와 같은 가능의 세계에서 생성될 유동적인 몸과 그에 깃든 영혼을 형상화한다. 잡지에서 뜯어낸 풍경을 찢어 붙여 만들어낸 캐릭터의 몸은 비어있으나, 주위의 형상들과 더불어 자신의 모습을 이룬다. 캐릭터는 소멸과 탄생의 순간에 만들어지는 모순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유경
이유경은 미국 유학 이후 뉴욕에서 풀다임 주니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유명 대도시의 디자이너라니, 어떤 이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미술 전공을 살려 일자리를 구했다고 부러워할 테지만, 그는 자신을 부러워할 이들보다 자신이 부러워하는 이들이 더욱더 신경 쓰인다. 그가 부러워하는 이들은 회화를 하면서도 경제적 불안과 자기 의심에 시달리지 않는 이들이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작가는 자기 연민과 자학을 오가며, 경제적 자립과 자아 성취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임종연
눈이 사람처럼 보이는 경계는 어디쯤일까. 그리고 눈을 뭉쳐 사람 형태를 만드는 행위에는 어떤 무의식이 숨어 있을까. 나와 닮은 존재를 만들려는 의식, 그에 나를 투사하려는 의식, 나의 흔적을 남기려는 의식 등이 있을 것이다. 임종연은 눈사람을 빚어내는 행위로부터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는 행위를 연상한다. 작가는 서있는 사람과 유사한 크기의 눈사람 형상을 그림으로써 짓는다. 덕분에 계절이 바뀌면 금세 녹아 사라질 눈사람은 그림이 존재하는 시간만큼의 생명을 얻는다.
임태엽
임태엽은 떠나간 고인에 대한 애도, 연인 사이의 그리움과 성애 등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사랑의 감정을 작품으로 다룬다. 작가는 <디지털 납골당>에서 AI로 생성된 이미지의 과잉을 통해 애도의 마음을 극복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고인을 가상으로 상정하고 그의 성장 과정을 다룬 이미지들은 기괴한 이미지들로 변형되어 퍼져나간다. <오, 나의 피앙세>는 도자로 만들어 인류가 멸망한 이후까지도 살아남을 작업이지만, 내부에 적힌 글씨들은 금방이라도 물에 씻겨나갈 듯하다. 한편 <좌표 오류의 욕망>은 연인에게서 느끼는 성애의 감정이 식욕으로 전환된 오류를 보여준다. 대체품으로서의 몸을 상정하는 작가의 태도는 새로운 몸과 물질성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조홍신
조홍신은 기존에 자연 풍경을 그려왔다. 그러나 최근 그의 작업은 점차 '작업실'이라는 공간으로 특정화되고 있다. 탐구의 주제가 축소된 이유는 익숙한 공간 속에서 사물의 위치나 빛의 변화처럼 미묘한 차이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작가는 드로잉을 통해 관찰을 시작하고, 장면을 감각하며 재구성해 나간다. 드로잉적인 요소는 회화에서도 보이는데, 작가는 고정된 형태보다는 흐름과 붓질의 흔적에 집중하여 작품을 만들어 간다. 그에게 작업은 답을 정해놓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선택과 반복을 통해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다.
진강
금속성을 띠고 있는 듯 보이는 은빛의 하트는 사실 흰 물감과 검은 물감이 아니라, 흰색 한지에 수묵으로 그린 것이다. 물을 스며들게 하고 물감을 번지게 하는 한지는 언뜻 보면 물성이 단단하고 형태가 명확한 금속을 표현하기에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한지와 붓을 극복해 가능한 수많은 표현들을 구현해 내고자 한다. 흔히 상반된 것으로 여겨지는 요소를 병치함으로써, 작가는 각기 다른 것들이 공존하는 화면을 만들어 낸다.
최현희
최현희는 최근 가상의 존재 ‘미니’를 등장시키고 있다. ‘미니’는 유동적인 존재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mini book>에서 미니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불과 흙, 빵과 귤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또한 레이어를 통해 이미지의 조합을 실험하는 데 관심을 두어 왔는데, 이번에는 <방향 레이어 실험 1, 2>에서 제거가 가능한 화살표 형태의 조각들을 회화적 붓질 위에 배치한다. 화살표들은 바람의 이동 경로를 나타내며, 비물질적인 것을 나타내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STEAK FILM
시스젠더 남성으로 태어난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퀴어적 성향으로 인해 자신의 꿈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의 불일치를 경험해야만 했다. 스마트폰으로 감상하는 <폭군의 관리인: 훈중년바텀알바 연대기>는 작가의 불안과 희열, 냉소와 희망 같은 상충되는 감정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인스타그램의 스토리에 올리는 영상에서 위악을 떨고, 더 나아가 희귀한 “폭군의 관리인”이라는 페르소나를 구축하고자 한다. 그는 화장실에 페르소나가 등장하는 영상과 즉석사진을 설치하고, 붉은 조명을 뿌림으로써 반규범적 태도와 반항의 장소를 연상시킨다.
《이사전》
작가: 권동기, 김다슬, 김서연, 김서현우, 박지영, 박효범, 소쇄, 윤선우, 이십칠, 이유경, 임종연, 임태엽, 조홍신, 진강, 최현희, STEAK FILM
기간: 2025년 7월 28일(월)~31일(목)
장소: 레드판다하우스 지하 102호 (서울 마포구 서강로9길 44)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10시 (31일 오전 10시~오후 6시)
기획: 김망고 / 협력 및 글: 윤형신 / 사진: 최철림
*주의: 게릴라 전시 특성상 전시 기간 중 작품이 설치되고 철수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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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사전》(2025. 7. 28.~31.)을 위해 쓰인 작가 소개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