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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옥 Apr 02. 2024

일은 이렇게 시작됐다

번역팀 일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해외 거래처에서 받은 문서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국의 해당 기관에 제출하는 일과, 그 결과를 보고하는 일. 

첫 번째 일은 언제나 정해진 마감일이 있다. 마감은 변동이 어렵고 지키지 못하면 회사에 큰 손해를 끼친다. 게다가 번역에 오류가 있으면 해결할 복잡한 일까지 생겨 심적 부담이 늘 따른다. 두 번째 일은 한없이 지체할 순 없지만 꼭 지켜야 할 마감일은 없다. 혹시라도 번역에 오류가 생겨도 크게 문제 될 일은 없다. 사과 서신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어도 정정은 가능하다. 같은 양의 일이라도 두 번째 일이 심적 부담이 덜하다. 

우린 두 일을 간단히 ‘번역’과 ‘보고’로 불렀는데 모든 팀원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번역을 기본적으로 하면서 틈틈이 보고도 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은희가 일을 분리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번역만 하는 사람과 보고만 하는 사람으로. 두 가지 일을 같이하니 정신도 없고 효율적이지도 않은 것 같다면서. 이렇게 해 온 지가 몇 년인데 이제와서 갑자기 정신이 없다는 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도 이해지만 무엇보다 우린 일을 나눠서 할 만큼 인원이 충분하지 않았다. 난 매번 같은 답을 했다. 

“인원이 많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우린 힘들 거 같은데? 특히 지금처럼 일이 몰려 들어오면 번역만 하는 쪽이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난 덤덤한 척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은희는 연차가 쌓이면서 마감에 쫓기는 번역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처음엔 “이 일은 언제까지 해야 하나”하는 정도의 푸념이었다. 난 “그러게”하며 가볍게 맞장구를 치곤 넘겼지만 은희는 비슷한 말은 몇 번인가 더 반복하더니 점점 구체적인 계획을 얘기했다. 

“두 명 정도가 보고를 하고 나머지가 번역을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난 분명히 어렵지 않겠냐는 대답한 것 같은데 은희는 팀원들에게 다시 같은 걸 물었다. 물었다기보다 설득에 더 가까웠다. “그게 더 낫지 않아? 안 그래?”하며.

다들 선뜻 대답을 못 하는 가운데 막내 바로 위 현아가 답했다. 

“그럼 다 보고만 하고 싶어 하지 번역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속으로 풋! 하고 웃음이 났다. 은희의 속셈을 알고 한 말이었을까, 순수하게 자기 생각을 말한 거였을까. 아님 순수한 척하며 은희를 비꼰 거였을까. 어느 쪽이든 이럴 때면 요즘 애들은 확실히 달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것 봐라’ 싶기도 하면서. 속이 들킨 은희는 대꾸하지 못한 채 두 눈은 갈 곳을 잃은 듯 우왕좌왕했다. 그 모습이 좀 웃겼다. 은희는 표정을 감추는 데 재능이 없다. 아닌가. 머리가 나쁜 건가. 일을 꾸미려면 그럴듯한 이유까지 준비했어야지.      


이후 은희는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일을 나누는 건 없던 일이 되나 보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에 내가 얘기했던 번역이랑 보고랑 나누자는 거.”

은희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불안했다. 갑자기 그 일은 왜 또. 

“강 부장님하고 얘기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어.”

“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부장님이 그러래?”

“알아서 하라던데? 내가 막내랑 보고를 맡을게. 아무래도 번역에서 경력자가 빠지면 일이 많이 힘들 테니까.”

적당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알아서 하라니? 강 부장은 뭐 하는 사람이지? 은희 얘도 참 웃기네. 다 내켜 하지 않는 걸 기어이 하겠다고? 게다가 일은 자기 편한 대로 만들어 놓고 뭘 생각해주는 척이야. 


가끔 이런 사람이 있긴 했다. 대놓고 이기적인 사람. 너무 ‘대놓고’라서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대체로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처럼 쌓인 정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뻔뻔하고 일방적이긴 해도 그쪽도 어느 정도는 ‘우리 사이에’라며 비빌 언덕 정도는 있다고 믿는 경우였다. 나도 ‘아후 진짜. 이번 한 번만 봐준다’ 하면서 모른 척 받아주는.

근데 이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지. 우리가 그렇게 막 서로 이해해주고 그런 사이 아니잖아? 게다가 나 하나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전 팀원 의견을 이렇게 깡그리 무시할 수가 있나.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뒤늦게 통보받은 지윤의 목소리에서는 흥분이 느껴졌다. 

“진짜 어이가 없네요. 기어이 하겠다는 거예요?”

내 머리도 복잡해 난 길게 얘기할 여력이 없었다. 딱히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러기로 했다는데 일단 해보자는 말밖엔. 지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굳이 그렇게 하겠다면 해야죠, 뭐.”라며 씁쓸한 표정만 지었다.      


     

업무를 변경하고 두어 달이 지났다. 걱정했던 대로 그동안 일은 쏟아져 들어왔다. 며칠 뒤 마감을 앞두고 초집중 상태를 몇 시간째 유지하던 참이었다. 카톡 창이 속하고 올라왔다. 

‘언니 우리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지윤이었다. 앞뒤 설명 없이도 무슨 말인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많이 힘들지?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같이 한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지윤의 글에서 뭔가 비장함이 느껴졌다. 난 어리둥절했다. 안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그럼 어떻게’라고 썼다 지우고 ‘다른 방법이라도’라고 썼다 다시 지우는데 기다리기 답답했는지 지윤은 다음 말을 보냈다. 

‘일이 이 정도면 은희 언니도 같이 번역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신 우리가 은희 언니 일을 나눠서 하면 되잖아요. 일이 이 지경인데 어쩜 저렇게 나 몰라라 해요. 해도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지윤은 내가 낄 틈도 없이 글을 주르륵 쏟아냈다. 

‘그게 좋긴 한데’ 지윤이 한 템포 쉬는 틈에 난 겨우 끼어들었다. ‘은희가 계속 고집을 부리니까. 업무가 섞여서 너무 복잡하다면서.’

지윤의 카톡은 다시 빨라졌다. 

‘복잡하긴 뭐가 복잡해요. 뻔히 번역 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다 아는데.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에요?’

난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많은 할 말 중에 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강 부장하고 둘이 결정한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부터 얘기해야 할지,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부터 번역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는 말부터 해야 할지. 아님 왜 은희는 사람들과 소통할 줄을 모를까, 모르는 건가 안 하는 건가를 얘기해야 할지. 복잡한 생각과 달리 내가 한 답은 ‘그러게 내 말이’ 뿐이었다. 시큰둥해 보이는 내 반응에 지윤은 실망했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지윤이 다시 톡을 보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뭔가 불안했다. 보통 이런 말 뒤엔 그간 참아왔던 말이 나오는 법.

‘언니가 은희 언니한테 다시 원래대로 하자고 얘기해 보면 안 될까요? 전처럼 번역이랑 보고를 다 같이 하자고요. 밑에 애들도 미치려고 해요. 다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지금 속 편한 건 은희 언니뿐이에요.’

난 진작부터 은희에게 얘기해 볼까 싶었지만 그때마다 ‘얘기를 들을까? 말이 통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괜히 서로 불편해지기만 할 것 같았다. 지윤이 먼저 말을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지윤은 힘들어도 일단 버티는 데까진 버티는 스타일이다. 지윤을 비롯해 다들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지윤이나 다른 후배들의 의견엔 이견이 없지만 혼자 나서는 게 좀 마음에 걸렸다. 듣기에 따라 특히 은희라면 불편해할 수도 있는 말이라. 난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얘기하는 건 나도 찬성인데 할 거면 다 같이 하는 게 좋지 않아?’

‘그럼 좋은데 여럿이서 한 사람에게 얘기하면 자칫하면 공격하는 걸로 느낄 수도 있고. 게다가 저희까지 나서면 은희 언니 입장에선 버릇없다고 생각할 것도 같아서요.’

지윤이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일단 알았다고 했다. 그러겠다고는 했는데 일하는 내내 고민이 되었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슨 말부터 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심각한 표정이어야 할까. 편안하지만 진지한 표정이 나으려나. 은희가 단번에 싫다고 하면 어쩌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지도 모르는데 그땐 뭐라고 하지.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난 은희 기분을 걱정하는 걸까, 은희 반응으로 인해 내 기분이 상할까 봐 미리 긴장하는 걸까. 


그나저나 내가 대표로 얘기하는 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네. 나중에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닌지. 그때 가서 ‘저흰 몰랐어요’라며 다들 발뺌하거나 모른 척 침묵으로 일관하면 곤란한데. 부정보다 더 괘씸한 게 침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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