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정해 둔 나라가 특별히 있었던 건 아니다. 그렇다고 둘 중 누군가의 일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 한국이 싫어서였다. 가족과 친척 그리고 온갖 지인이 다 있는 한국에서 사는 게 싫었다. 우리 삶에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이도 없고, 신경 써야 할 어떤 잡음도 없고, 혈연, 지연, 학연, 회사연 등 각종 연이란 연은 다 들먹이며 피곤하게 질척이는 이도 없는 곳에서 단지 우리의 삶에만 집중하며 살고 싶었다.
이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남편에겐 복잡한 가족사가 있었고 우리 집 역시 화목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집안은 아니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소소한 곳에서 즐거움도 느끼며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 싶은 즈음에 꼭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가 날아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가 잠잠하다 싶으면 저기서 돌멩이가 날아들고 저기가 잠잠하다 싶으면 여기서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그때 우린 가정이든 회사든 아직 기반도 못 잡은 때라 열심히 사는 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게 없었다. 열심히 벌고 열심히 모으고 열심히 배우고. 하루하루를 빈틈없이 꽉꽉 채워가며 사는 우리에게 갑자기 날아드는 작은 돌멩이 하나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루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일주일을 고뇌하게 만들고 그러다 보면 한 달이 통째로 흔들렸다.
이건 비단 가족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좀 가깝다(본인들 기준에) 싶으면 왜들 그렇게 말도 많고, 참견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은지. 몇 퍼센트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로, 과거의 한때를 같이 보냈다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불쑥불쑥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우리가 보통 사이냐면서. 우리가 남이냐면서.
아주 작은 예를 하나 들자면 이런 거다. 남편이 예전에 다녔던 한 회사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게 보통 인연이냐며 걸핏하면 ‘패밀리’를 외쳤다. 그러면서 회사 동료는 단순히 일을 같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제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다. 물론 나는 남편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그냥 듣기에도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더 황당한 건 차장님, 부장님 대신 ‘형’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다. “회사가 놀이터야?”란 말이 절로 나왔다. 남편도 처음엔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며 힘들어하더니 어느새 “○○이 형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난 그 모습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오래전 얘기긴 하지만 거긴 참 재밌는 곳이었다. 일 시킬 땐 직원에 대한 배려조차 없으면서 술만 마셨다 하면 형 찾고 동생 찾고 어찌나 애틋한지, 가족애가 넘쳐흘렀다. 그러다 그 가족애를 주최하지 못하면 내게 전화를 해서는 “제수씨!” 혹은 “형수님!”을 부르짖었다. 그럼 난 내가 왜 그들의 제수씨이고 형수님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한참 들어야 했다. 아이를 재우다 말고, 대충 정리를 마치고 늦은 시간에 내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혹은 자다 말고. 마지막은 항상 남편의 미안하다는 말로 마무리가 되었다. 나중에 어쩌다 누군가의 결혼식 같은 행사가 있어 대낮에, 맨 정신으로 만나면 그땐 또 어찌나 예의를 차리던지. 한밤중에 제수씨를 부르짖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 사람이 맞는지 난 몇 번이고 남편에게 확인을 해야 했다. 남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남편이 그 회사를 나오길 참 잘했다 생각한다.
처음 이민 얘기가 나왔던 곳은 호주였다. 당시 남편은 준비하던 자격증 시험이 하나 있었는데 그 자격증과 국내에서의 일정 경력이 인정되면 호주에서 취업 이민이 가능하다 했다. 우린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런저런 걸 열심히 알아봤다. 그러다 누군가의 호주는 그렇게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말에 급격히 마음을 접었다. 굳이 거기까지 가서 인종차별받으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 고민했던 건 싱가포르였다. 남편의 후배가 얼마 전 싱가포르로 이민을 갔는데 온다고 하면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이번엔 호주 때보다 좀 더 구체적이었다. 그때보다 더 진지하게 알아봤다. 그러던 중 거긴 우리나라보다 교육열이 더 심하다는 말에 마음을 또 접었다. 굳이 거기까지 가서 애 잡을 일이 있을까 싶었다. 일본도 잠시 생각했었다. 근데 툭하면 터지는 한일 문제 속에서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 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 외에도 몇 군데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우린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민 얘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대화의 깊이감은 줄어들었다. “이민 갈까?” “좋지” 정도랄까. 그러다 보면 대화의 끝은 항상 ‘그냥 여기서 살지 뭘’이 되었다.
그렇다고 주변이 바뀐 건 아니다. 별생각 없이 때때로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우리 사이에’, ‘우리가 남이야?’를 외치며 사람 피곤하게 하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개인의 삶을 강조하는 내게 “여기가 미국이야?”라며 그럴 거면 미국 가서 살라는 이젠 대꾸하기도 지치게 만드는 사람도 그대로다. 다만 바뀐 게 있다면 내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다. 전에는 어디선가 날아든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정신 못 차리고 출렁였다면 지금은 이쯤에서 돌멩이 하나가 날아들겠구나, 하는 감 정도는 생긴 것 같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맞는 돌멩이는 그리 큰 파도로 이어지진 않는다. 예상을 못했다 하더라도 일렁이는 파도에 어쩔 줄 몰라 하기보다 이젠 여유를 갖고 파도를 탈 줄 안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이건 파도다. 파도는 곧 지나간다’ 정도는 알고 있으며 조금은 느긋하게 파도가 지나가길 기다릴 줄도 안다.
요즘 우리는 슬슬 한국만큼 살기 좋은 데가 어딨어,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민을 갔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관계로부터 도망치듯 떠나지 않은 것 하나만은 잘하지 않았나 싶다. 모든 것들이 말끔하게 정리된 것도 정리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짊어지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하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